이 일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C국에서 좀 더 오래 살았을까? 글쎄, 한 주역학자가 이렇게 말한 걸 들은 적 있다. 단순히 가벼운 하나의 경험으로 끝난 게 아니라, 그 경험을 계기로 파국까지 치달았다면 그건 결국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인생의 사건은 모두 개연성을 갖고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 있어 특정 사건을 막아도 결말은 비슷할 거란 얘기다. 과거를 곱씹으며 다른 가정을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받아들이면 마음이 평화롭다.
C국에서 살았던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 회사에서 구체적인 계약 사항을 논의하던 중이었다. 이 나라는 맞지 않는 구석이 많지만 1년 정도는 더 살아봐도 괜찮겠단 생각을 하던 차였다. 지금 돌아보면 하던 걸 그만두지 않으려는 관성에 불과했다.
좋은 감정으로 알아가던 동료 A가 있었다. A의 느린 호흡이 좋았다.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A가 나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연인으로 관계를 규정한 건 아니지만 점점 연인 같은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A는 넘치는 마음을 담아낼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이었던 걸까. 때론 갑자기 못되게 굴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연기하지 말라며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했고, 무슨 일이냐며 거듭 묻는 내게 그는 다 알고 있다는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화가 난 나는 마음을 열고 대화할 생각이 없으면 당장 꺼지라고 했고, A는 사실 그냥 네 반응을 시험해 본 거라고 했다. 사람마다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는 방법은 다르다. A는 놀라며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을 통해 사랑을 느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당황스러울 정도로 찌질해 할 말이 없었다. A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뭐가 문제냐고 물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아직 너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리고 이건 사소한 다툼이지만 우린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A는 몇 번이고 다시 대화를 시도했지만 끝까지 사과는 없었다. 아무런 반응도 없는 나를 보고 단념한 듯 보였고,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못 본 척 지냈다. 그러다 사내 행사에서 마주친 A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눈을 보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나를 뒤에서 껴안고 목에 키스를 했다.
당황한 난 떨어지라고 했으나 A는 듣지 않았다. 정신 좀 차리라고 배를 세게 때리자 그는 놀라며 나가떨어졌다. 모두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매니저는 뭐 하는 거냐며 A는 가만 놔둔 채 나를 꾸짖었다.
"너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안 돼. 여기 내가 데려온 손님들도 있잖아."
화는 부당함에 대한 반응이다. 누군가가 한껏 화가 난 상태서 옳은 처신에 대해 충고하는 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다. 당시 이성적이지 못했던 나는 매니저를 한 대 쳤다. 한 대를 치고 나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 대를 더 쳤다. 한국 회사였다면 신입사원이 부장님을 때린 격이다. 나보다 열두 살 많은 남자인 매니저는 눈물을 글썽였고, 이날 이후로 난 사내에서 크게 유명해졌다.
난 왜 화가 났을까? 조용한 도서관에서 한 남자가 여자를 데려가 강간하려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놀란 여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도서관 사서가 여자에게 다가와 말한다.
"너 이렇게 행동하면 안 돼. 도서관에선 조용히 해야지.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을 지적하는 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던 상황이라도 그는 그렇게 말했을까? 고작 가벼운 스킨십을 하려던 건데 왜 이렇게 난동을 피우냐고 생각한 걸까? 그럼 이 정도면 용인될 만한 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건지 궁금했다.
회사에서 여러 차례 미팅을 거치며 내 행동을 설명해야 했다. A에게선 아무런 사과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고, 나와 사이가 좋았던 시절 나눴던 메시지를 증거로 제시했다.
매니지먼트에게 A에 대한 처분을 요구했다. 안전을 위협받았다고 느꼈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면 사내 성희롱 정도는 괜찮다는 뜻이기에 신뢰하고 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터인 동시에 삶의 공간이었다. 아무런 보안 장치도 없는 기숙사에서 전 직원이 모여 살아가고 있었다.
대표는 나를 따로 불러 설득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친구를 바로 해고하고 싶어. 그런데 너희가 과거에 연인 같은 사이였기에 결정을 내리기 굉장히 복잡해. 너희가 공식적으로 헤어졌다는 증거가 부족해. 나는 누군가를 해고했다가 법정까지 가고 싶지 않아. A는 우리와 함께 오래 일했고, 그전엔 성희롱 관련 이슈가 아무것도 없었어.
A가 너를 좋아하니까 바로 그런 행동을 한 거야. 사실 너 스스로도 조금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가 끝난 뒤 지금 이런 진술을 하고 있잖아. 여기서 일하는 여자들은 주로 남편이나 남자 친구가 있어. 넌 싱글이고 평소 남자들과 가까이 지내잖아. 남자들과 거리를 두는 연습을 좀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너도 잘한 건 없으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는 게 어때?”
헛소리를 그럴싸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표님, 본질을 흐리고 계시네요. 이 일과 엮어서 저에 대해 함부로 충고하지 마세요. A가 설령 지금까지 저와 연인이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스킨십을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건 폭력이에요. 일터에서 어떠한 행동을 강요했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럼 제가 여기서 일한다면 앞으로 안전할 거라고 어떻게 보장하시죠?"
"넌 안전할 거야."
"제가 만약 기숙사에서 A에게 강간을 당한다면 '미안, 그때 그 친구를 해고했어야 했는데. 그러게 네 행동을 조심했어야지.'라고 얘기하시겠네요."
“넌 지금 너한테 뭐가 중요한 지 모르는구나.”
우린 미팅을 통해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했고, 서로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거슬리던 문제를 포기하고 나니 일에 대한 마음까지 모두 사라졌다. 때론 한두 개의 블록만 뺐을 뿐인데 탑이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것처럼.
며칠 뒤, 비자 만료를 앞두고 출국해야 했다. 회사에서 내일 비행 전까지 지낼 수 있는 숙소를 잡아준다고 했고, 오피스 매니저 N이 함께 점심을 먹고 차로 이동하자고 했다. 정적이 흐르던 차 안, 그와는 지금까지 업무상 두 번 정도 본 사이라 딱히 할 얘기가 없었다. 운전을 하던 N은 향후 계획을 물었고, 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라고 답했다.
차에서 내려 호텔 체크인을 위해 로비에 앉아있었다. 그는 트렁크에서 내 캐리어를 꺼내 가져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설프게 내 어깨를 감싸고 스킨십을 하려 했다. N을 밀쳐내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맥락이 너무 뜬금없는데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널 좋아해. 한국 여자들은 참 예쁜 것 같아."
그 말은 한참 동안 내가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던 마음속 불꽃을 활활 지폈다. 내가 일하며 마주한 일들에 얽힌 근본적인 문제는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소비하는 게 용인되는 이 나라의 문화에 있었다. 물론 상대의 의사는 상관없이 말이다. 난 그간 비슷한 일로 몇 번씩 문제를 제기해왔고, 주로 상대가 해고 통지서를 받는 식의 결말로 마무리가 됐다. 속 시원한 듯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 또한 상처를 받았고, 그러는 넌 얼마나 깨끗하냐는 사람들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친했던 동료는 N은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훗날 이 일을 회고했을 때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을 떠올리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오늘 일을 요약함과 함께 불쾌하다는 내용이 담긴 메시지를 N에게 보내자 미안하다는 답장이 왔다. 대화 창을 캡처했고, 한번 일을 키워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