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표 Oct 27. 2021

연애와 섹스를 하지 않는다

일을 그만두고 나니 할 게 없었다. 시간이 난 김에 일본에 있는 언니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언니는 미군인 남자와 결혼해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에 살고 있었다. 결혼식은 따로 올리지 않았고, 나도 지난 몇 년간 계속 해외에 있었다 보니 그때까지 형부를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언니와 시간을 보내고, 형부도 만나러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널찍한 집에서 푹신한 이불을 덮고 뒹굴다 심심하면 언니와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맞이한 1월 1일. 한 해가 시작되자 문득 새로운 결심을 하고 싶었고,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연애와 섹스, 남자를 만나 둘만의 관계를 꾸려나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포기하는 건 어떨까.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며 많은 욕망을 주입받는다. 어릴 때부터 보고 들어온 이상적인 20대 후반 여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언제나 예쁘고 세련되게 자기 자신을 꾸밀 줄 안다. 전문직에 종사하며 당당히 커리어를 쌓는다. 그러다 멋지고 능력 있는 애인을 만나 평생을 함께할 계획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일과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들의 일상은 어딘가 멋져 보였다. <섹스 앤 더 시티> 속 언니들이 끊임없이 남자를 만나는 것처럼, 매체에선 비슷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어느 사회나 이상적인 표준상이 있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동경한다. 그래서 성형과 다이어트를 하고, 파트너로 적당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 등의 행동을 한다. 이를 두고 철학자 미셀 푸코는 말한다. 근대 사회에 들어서며 권력을 가진 자들이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 이상적인 표준상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학교, 미디어 등 사회로부터 이를 강요받는다고. 개성을 가졌던 이들은 비정상이 되지 않고자 후엔 스스로를 억압하는 자발적 복종 상태에 이른다. 사실 그러한 노력을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다 내가 표준에 이르면 내심 뿌듯했다. 누구나 그렇듯 타인의 눈에 꽤 괜찮아 보이는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허영심은 내가 그럴듯한 남자를 만나고 싶었던 주된 이유다. 드라마에선 비현실적인 남자와 여자가 나와 인생에서 사랑이 전부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고 했고, 멋진 남자와의 데이트는 친구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대화 소재가 됐다. 그래서 매력적인 남자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기뻤다. 화려한 액세서리를 한 듯 더 나은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과연 정작 나는 연애에서 얼마나 만족감을 느꼈을까. 최근 지나간 관계를 돌아보는 시간 속에서 알아차렸다. 연인 관계로 규정되지 않았다면 훨씬 더 좋았을 관계들이 있었단 걸.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바로 관계를 중단하는 날 보고 사람들은 너무 차갑다고 했지만, 나 또한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요즘은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홀로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을 채운다. 어쩌면 난 연애를 하지 않을 때 더 행복하고 평온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애를 선택하지 않아 보기로 했다. 살아오며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다지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행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매일 아침 30분씩 공들여 했던 화장, 습관적으로 했던 다이어트,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별다른 고민 없이 준비한 대입 같은 것들이 그랬다. 관성처럼 삶에 배어있던 습관이 날 불편하게 만들 때면 가능한 그것들을 잠시 멀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면 어떨지 궁금해서다. 그렇게 그만둔 대부분은 예전엔 이걸 어떻게 꼿꼿이 쥐고 살았지 싶을 정도로 해방감을 안겨줬으나, 가끔은 밀어낸 것 중 하나를 다시 취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쥐고 있던 것을 포기함으로써 만들어진 여백은 내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줬다. 물건 하나를 살 때도 가격과 디자인, 효능을 꼼꼼히 고려하지 않는가. 종합적으로 그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면 행복의 총합을 늘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구매를 결정한다. 삶에서 남들에 의해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버려내고 스스로 확신이 드는 것들로 하루를 채우고 싶다.


연애를 일상에서 빼면 난 어떤 사람이 될까. 주위 사람들에게 파트너로 고려되지 않은 채, 누군가를 유혹하거나 누군가에게 유혹당하는 것 없이 사는 건 어떨까. 더 편해질까, 불편해질까. 낯선 땅에서 물음표를 가진 채 홀로서기를 꿈꾼다.

이전 10화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는 참지 않는다 下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