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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표 Sep 13. 2022

길거리 헌팅은 경찰에 신고한다

이슬람 국가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성적인 대상으로 취급되는 불쾌한 경험은 계속 이어졌다.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겪는 경험도 힘들었지만 자국에서 자국민임에도 겪었던 부당함은 더 큰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닌 가까운 이에게 몰이해한 말을 들었을 때 더욱 상처가 되는 것처럼. 하지만 유사한 경험이 이어지다 보니 어디서든 문제를 해결하고 나를 지키는 법을 익히게 됐다.


해외 생활을 뒤로한 채 국내에서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평일엔 출근하고 주말엔 친구들을 만나는 일상을 보내니 딱 남들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경찰차를 타고 귀가하는 건 그렇게 흔한 경험은 아니겠지.


친구들과 맥주를 마신 뒤 혼자 밤 11시쯤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는데 낯익은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2주 전쯤 근처에서 대뜸 남자친구 유무를 물어봤던 남자. 살면서 모르는 남자들이 연락처를 물어본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이었다. 얼굴에 복이 많으시다며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면 드는 느낌과 비슷했다. 놀란 마음에 거절한 뒤 달아나듯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남자를 횡단보도 앞에서 다시 마주친 것이다. 순간 경직돼 고개를 황급히 돌린 채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하며 걸었다. 그러자 그가 따라왔다. “저기요”라고 날 부르며. 귀에서 에어팟을 빼지 않은 채 무시하고 걸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계속 따라오며 말을 붙였다.

"왜 나를 피하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서 에어팟을 뺐다. 대체 왜 이러시냐고 묻자 그가 되물었다.

"그냥 길 물어보려고 한 건데 왜 사람을 보고 정색해요? 왜 나를 싫어하냐고요."


그렇게 약간의 실랑이가 오갔다.

"2주 전쯤 저한테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상황이 불편해서 피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진짜 길 물어보려고 했어요. 왜 화를 내요?"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갈 길 가세요."

다시 발걸음을 돌렸으나 "저한테 악감정 있으세요?"라고 하며 계속 뒤를 따라왔다. 이젠 도저히 좋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던 차, 갑자기 잊고 있던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한창 페이스북을 하던 대학생 시절, 모르는 남자로부터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던 날.


「안녕하세요. 제가 우연히 만남 앱에서 근처 거리로 뜨는 어떤 남자와 대화를 하게 됐는데 그분이 혹시 K대학 다니냐며, K대학 이진표 아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아는 사람 소개로 술자리에서 이진표 씨를 만나 섹스한 적이 있다고 하며 이진표 씨 벗은 사진을 보냈어요. 위험한 상황인 것 같아서 직접 전해드리려고요.」


두서없이 정황을 설명한 말을 정리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황당했다. 나도 내 사진을 좀 보고 싶어서 캡처해둔 게 있는지 물었더니 상대가 일방적으로 대화를 종료해서 자료는 없다고 했다. 그럼 지금 경찰서에 같이 가서 증언을 해줄 수 있는지 묻자 페이스북을 탈퇴하고 사라졌다. 애초에 페이스북도 방금 가입한 듯한 계정이었다. 평화로웠던 밤, 갑자기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이미 사방이 어두웠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찝찝했다. 친한 남자인 친구를 불러 근처 경찰서에 갔다. 맥락을 전혀 못 잡는 듯한 경찰 한 명이 무신경한 태도로 말했다.

“그 앱에서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서 문제긴 해요. 근데 회원 가입도 필요 없고 캡처도 불가능해요. 한쪽이 쪽지를 닫으면 기록이 다 지워지는 앱이라 어쩔 수가 없어요.”


듣고 있자니 궁금해졌다.

“그 앱에서 성범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데 그럼 왜 아직까지 아무것도 대책이 없어요?”

“그건 국가에서 관리하는 거라 어쩔 수 없어요. 본인 당사자가 조심해야죠. 다른 경찰서에 가보세요. 제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예요."


한참을 횡설수설했으나 요지는 명확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것. 경찰관을 응시하다 묵묵히 서를 나왔다. 동행한 친구는 벌어지는 상황에 화가 났는지 날 다그쳤다.

“그러게 내가 평소에 너 술 마시고 다니지 말랬잖아. 조심했어야지.”


그 말을 들으니 억눌렀던 화가 폭발했다. 살면서 한 번도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마신 적 없었다. 설령 술에 취했다 할지라도 그런 사진이 있다면 찍은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나에게 화살을 돌려야 할 상황은 아닌 게 분명했다.


불같이 화를 내자 친구는 말했다. “진표 네가 더럽지 않은 걸 믿는다”고. 난 깨끗함을 지향하지 않으며 이를 의심받아 화를 낸 게 아니었지만, 더 이상 설명할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힘이 돼줄 거라고 믿었던 사람의 말이 더 아파서 가슴이 욱신거렸다.


집에 와 곰곰이 생각했다. 계정까지 만들어 쪽지를 보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단지 당황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던 걸까. 돈을 뜯어내려고 했던 걸까. 하지만 안다. 이렇게 혼자 곱씹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변화를 만들고 싶었다. 단단한 벽에 작은 돌이라도 던져보는 게 어떨까, 아무 미동도 일으키지 못할지라도.



그리고 다시 지금, 자꾸만 날 따라오는 이 남자. 상황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개의 선택지가 머리를 스쳤다. 1번, 때린다. 2번, 욕을 퍼붓는다. 3번, 무시하고 갈 길을 계속 간다. 1번은 리스크가 크다. 3번은 이미 몇 번 시도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2번을 골랐다.

"곱게 말할 때 얌전히 네 갈 길로 꺼져. 주둥이를 찢어버리기 전에. 어디서 개수작이야, 이 씨발 새끼야.”


안타깝게도 상황은 정리되지 않았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라며 그도 함께 언성을 높였다.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근처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며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신고하는 모습을 보면 그만 포기하고 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식당까지 따라 들어오며 되레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원래 다른 사람한테도 이러세요? 원래 이렇게 자주 불안감을 느끼세요? 이 근처에 사시죠?"


한숨이 나왔다. 소모적인 논쟁을 하는 건 정말이지 피곤했다.

"전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경찰이 오면 제 이야기를 할 거고요.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언성을 높이는 건 굉장히 실례가 되는 거예요. 지금 그쪽이 하는 말 모두 녹음하고 있으니까 계속 불쾌한 언행을 반복하시면 추후 문제 삼으려고 합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마감 정리를 하시던 식당 아주머니 두 분께서 언성을 높이셨다.

"아니, 갑자기 들어와서 시끄럽게 뭐 하는 거야? 사랑싸움 같은데 둘이 잘 해결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죄송하다고 사과드린 뒤 잠시만 조용히 있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신고를 한 지 십분쯤 지났을까. 경찰 네다섯 분 정도가 오셨고 내게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하셨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경찰분들께서 잔뜩 화를 내셨다.

"이 여자분이 널 보고 정색을 하던 피하던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네 갈 길 가면 되지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 이 여자분은 너랑 말 섞기도 싫어하는 것 같은데. 네가 싫다잖아. 어디서 헛소리를 해?"

그러자 그가 말했다.

"저 너무 억울해요. 이 여자가 날 불안하게 하는데, 나도 불안한데 왜 내 얘기는 안 들어줘요?"


경찰분들은 그를 둘러싼 채 다그치셨고, 스토킹 혐의로 범칙금 처분을 내리셨다. 금액은 5만 원으로 얼마 안 되지만, 기록으로 남으니 비슷한 일이 또 생기면 바로 처벌할 수 있다고 하셨다.

"다음엔 쟤 얼굴만 보면 바로 신고하세요."

화난 어조로 날 달래주시는 경찰분들을 보며 마음이 서서히 진정됐고, 그도 앞으로 비슷한 행동을 쉽게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차를 타고 집에 오는 것으로 상황은 종결됐다.


아마 누군가는 예전의 그 친구처럼 나를 겨누며 지적할 것이다. 그러게 왜 혼자 밤길을 다니냐고, 당신이 좀 더 조심하지 그랬냐고. 또 말할 것이다. 모든 남자들이 그런 건 아니라고, 좋은 남자도 많은데 당신이 유독 운이 나쁜 게 아니냐고. 난 학생 때처럼 타인의 평가에 상처 입지 않는다. 평가는 남들의 몫. 이러나저러나 언제나 그랬듯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다. 왜 참아야 하는지 모르겠는 부당함은 참지 않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그 남자를 길에서 다시 마주쳤다. 아직도 싫다는 여자를 쫓아다니는지 궁금해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가갔다. 황급히 피하는 통에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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