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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표 Sep 17. 2022

스타트업은 다니지 않는다 上


12월 31일은 각종 기념일에 감흥이 없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느낌을 주는 날이다. 한 스타트업에서 영어 교육 콘텐츠를 총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출근해야 했던지라 여느 일상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도 곧 해가 넘어간다는 생각에, 올해 꽤 열심히 살아서 결실을 이뤘다는 생각에 조금 설렜다. 한창 바쁘게 업무를 하던 중, 대표 M이 개인적으로 잠시 얘길 하자며 불렀다.


"결론부터 말할게요. 당신은 다른 회사에 가야 더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를 지금 해고하시는 건가요?"

"네."

"사유가 궁금하네요."

"영어 자막 관련 문제가 컸어요. 아직도 업무의 감을 못 잡아서요."


새로운 교육 콘텐츠를 제작해야 할 때였고,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의 영상과 영어 자막이 필요했다. 자막을 따로 제작해 주는 서비스를 찾으니 비용이 예산을 훨씬 초과해 아무리 싸게 조율하려 해도 어려웠다. 유튜브를 한참 더 리서치한 결과 자체적으로 영어 자막을 모두 제작해둔 해외 채널을 발견했고, 따로 비용을 들이지 않고 여기에 있는 자료들로 진행하자고 결론이 난 터였다. 그런데 M은 갑자기 이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모두 내 잘못이라고 떠넘기고 있었다.


"제가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아 제시했잖아요. 그로 인해 예산도 훨씬 아낄 수 있었고요. M도 이해했는데 뭐가 문제죠?"

"아, 그 문제는 잘했어요. 그런데 업무 범위가 자신의 주 업무로 점점 좁혀지더라고요. 그건 제가 바라던 조직원 상이 아니에요."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이미 해고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아무 말을 뱉는 것 같았다.


"진행하는 주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끝내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성과 단위로 숫자가 매일 측정되고 있고, 하루라도 게을리하면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기간이 늦춰져요. 게다가 M은 제가 제시한 기간보다 더 빨리 끝내는 걸 원했고요. 다른 회의에 참여하면 3시간 정도는 제 업무를 방치해 둬야 하니 우선순위에 따라 업무 관여도를 낮춘 거예요. 이에 대해 M과 다른 팀원의 의견을 물었을 때 동일한 의견이라고 답했잖아요. 그런데 제가 멍청한 결정을 했나 보네요."


"멍청한 결정이 아니라... 그동안 정말 열심히 한 것, 많은 가치를 만든 것 다 알아요. 단지 우리랑 맞지 않는 거예요. 나이에 비해 책임이 큰 자리라 부담감이 많이 컸을 거예요."


"다른 팀원들의 업무까지도 서포트할 수 있게 회사 근처에 살면서 하루 14시간씩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나 보네요. 전 지금까지 여기서 일하며 제게 그 정도를 바라는 줄은 몰랐네요. 의견을 묻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거면 제가 아주 한심하게 일했나 봅니다."


나는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하루 세 끼를 회사에서 먹는 날들을 보냈다. 회사에선 이를 두고 '자발적 야근'이라고 명명했고, 입사 전 합의된 사항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며 뿌듯함을 느꼈지만, 몇 개월간 반복되니 자꾸만 마음에 털 뭉치들이 쌓이는 것 같았다.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났는데 내가 왜 불행한지조차 몰랐고, 몸이 아파서 일주일에 한 번씩 어깨 마사지를 받지 않으면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저도 진표 씨를 해고하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어요. 제 결정이 잘못된 걸 수도 있어요. 갈팡질팡하지만 결정해야 하니까 대표로서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본인이 만든 회사를 그렇게 운영하기로 했다면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하고 있던 업무는 어떻게 정리하면 되죠?"

"오늘 정리하시고 편하신 때 가시면 됩니다. 그동안 너무 잘해줬고, 팀원들도 고마워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가 박수를 치면서 보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당일 해고 통보를 한 상황에서 박수를 치겠다니.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삼켰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뒤 웃으며 말했다.

"그건 좀 아니네요. 다들 일하시는데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가고 싶어요."


의도했건 아니건 한 회사 생활의 마침표를 찍고 나면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원래 그런 것이다. 고용주는 외친다. ‘주인 의식’을 가진 채 ‘의미’ 있게 일하라. ‘동반성장’을 이루면 미래에 큰 ‘보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용주가 노동자를 해고하기로 결정하면 노동자는 그 일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큰 책임감으로 열정을 쏟아왔어도 말이다. 모두 당연한 거지만 갑자기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퇴근길, 회사에서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날 때였을까. 정규직 계약서와 함께 스톡옵션을 논의하고 있었다. M은 말했다. 스타트업의 주식은 High Risk, High Return이다. 연봉을 깎고 스톡옵션을 받아라. 당신은 지금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고 있는 것이다. 미심쩍었던 나는 변호사를 구해서 M이 건넨 계약서의 자문을 구했다. 어려운 말이 많아서 잘 모르겠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좋지 않은 조건 같았다. 거절 의사를 밝히자 반짝거렸던 M의 눈빛이 변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회사와 미래를 함께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럼 그냥 1년만 일하고 나갈 수도 있겠네요?"

"아직 그런 미래를 바라볼 단계가 아니에요. 제 업무 능력에 대해서도, 회사에 대해서도 아직은 신뢰가 부족해서 스톡옵션 얘기는 지금 하고 싶지 않은데요."

"준다는 데 왜 안 받겠다는 거예요? 확신이 없어도 지금 빨리 결정해야 해요. 누구나 그렇게 해요."

"그래요? 제가 선택권이 있는 줄 알았는데 황당하네요. 이 계약에 따르면 스톡옵션은 2년 뒤에나 효력이 생기는데 그 사이에 프로젝트가 엎어질 수도 있고, 제가 성과를 내지 못해서 해고될 수도 있지 않나요? 그래도 강제하시는 거면 그냥 받고 연봉을 깎겠습니다."


다음 날 M은 다시 착하고 선량한 얼굴로 돌아와서 말했다.

"어제는 제가 당황스러워서 신중하게 말하지 못했네요. 싫다는데 강제로 받게 하는 건 의미가 없잖아요. 그럼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원래 한번 거절하면 끝인데, 이런 좋은 기회를 다시 논의하는 회사는 없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의 연봉을 가까스로 맞춰줬다. 만약 내가 스톡옵션을 받았다면 그 대가로 최저 임금만 받고 일해야 했다. 사실 다른 디자이너는 훨씬 더 힘든 조건에서 일해왔다. 미래에 효력이 있을지 모르는 회사 지분 9%를 가지는 조건으로 월 50만 원을 받고 일했으며, 회사가 투자를 받은 뒤엔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하며 200만 원을 받았다.


"지분 비율에 대해선 그냥 M이 알아서 해줘."

그 디자이너는 M을 신뢰해 자신의 권리 또한 아무렇지 않게 맡겼다. 그런 사람과 다르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난 가성비가 떨어진다. 결과적으로 섣불리 서명하지 않은 건 현명한 결정이 됐다. M은 회사와 미래를 함께 하지 않을 작정이냐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으나, 정작 본인은 충분한 맥락을 제공하지 않은 채 나를 급히 잘라내지 않았는가. 스톡옵션을 활용해서 인건비를 아끼지 못하자 해고로 이어졌을 수도 있겠다. 직원인 내게 고용주 M이 제시한 선택권이란 허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내 M과 비슷했던 공동 대표 J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의 사수이기도 했던 J. J의 의견을 꼼꼼히 기록해 스스로 부족한 사항을 개선하려 했지만, 그는 도무지 일관성이 없었다. 뭘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다가 다음 날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그 부분을 언급하며 업무에 적용하기 혼란스럽다고 말하자 J는 이렇게 답했다.


"내 취향을 파악할 필요 없어요. 그냥 참고하라고 여러 의견을 준 거예요. 진표 씨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식으로 진행해요. 우린 진표 씨가 여기서 눈치를 보길 원하지 않아요. 주도적으로 책임을 지고 주장을 밝히세요."


예산도 알아서 정해서 프로젝트를 기획하라고 했다. 그래서 J에게 일일이 결재를 받지 않고 업무를 진행했다. 하루는 담당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의 급여를 올렸다. 인공 지능이 해석한 영어 문장을 검토 후 수정하는 번역 업무였고, 상당한 수준의 영어 실력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당 50원으로 턱없이 낮게 측정돼 있었다. 더 높이고 싶었으나 예산을 고려해 우선 65원으로 적용했다. 사실 올렸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인데도 J와 설왕설래를 해야 했다.


"20분짜리 드라마 한 편을 검토하는 데 11300원을 지급하기로 측정한 게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이건 1시간 반 시급인데요."

"네. 검토 시 모르는 표현이 있으면 모두 사전을 검색하며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드라마는 슬랭이 많은 편이라 애니메이션만큼 빠르게 진행되지 않아요. 그리고 최저 시급 올라서 2021년 기준으로 1시간 반은 13080원인데요."


다음날 J는 다시 물었다. 

"정말 적당한 예산이라고 생각해요? 시급 기준 1시간 20분이나 걸리는 거면 과연 아르바이트생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드네요. 관리가 잘 되고 있어 임금을 올린 거 아닌가요?"

"네. 그렇게 올려야 아르바이트생들이 작업에 숙련됐을 때 최저 시급이 나와요. 그럼 작품마다 얼마나 걸리는지 모두 정확한 시간을 재볼까요?"

"그래요. 재보고 알려줘요.”


다음날 J는 또다시 물었다. 

“진짜로 적당한가요? 100문장 기준으로 진표 씨가 일할 때 수정하는 횟수가 얼마나 돼요?"

"그런 디테일한 부분은 세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게 지금 왜 필요하신 거죠?"

"전 그냥 편하게 이것저것 얘기해 보고 싶었던 건데 진표 씨 생각은 다른가 보네요.”


서른 살 여성이었던 J는 권위적인 중년보다 훨씬 대하기 어려웠다. 눈치를 보면 우린 수평적 문화인데 왜 눈치를 보냐고 했고, 그렇다고 솔직한 생각을 말하면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꺾으려는 꼴이었다. 시간이 흘러 깨달았다. 먼저 의견을 얘기했다가 마찰이 생길 경우, 잠시 숙고한 뒤 수긍하는 척하며 “생각해 봤는데 J 말이 훨씬 합리적인 것 같아요.”라며 상급자의 기를 세워주는 게 보다 평화로웠을 것이다. 그럼 마냥 눈치를 본 것도 아니고 반기를 든 것도 아니므로 대화가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조직 생활에 서투른 나는 당시엔 미처 알지 못했다.


마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의견을 고집했던 이유는 형편없는 금액으로 사람을 쓰는 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재택근무를 시키며 완성된 작업물 단위로 급여를 지급하는 형태는 계약상 최저 시급을 적용하지 않아도 되기에 사실상 더 낮은 임금을 지급해도 문제가 없다. 코로나19로 일자리가 부쩍 줄어든 상황, 누군가는 단돈 만 원도 아쉬워 묵묵히 '가성비 인력'이 된다. 난 이러한 상황이 싫었다! 내규에 맞게 적은 금액이라도 올리고, 지속적으로 합리적인 보상 체계를 고민해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J에게 15원 차이로 3일동안 불려가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자니 몹시 피로했던 차였다. 


우습게도 M은 내가 맘에 드는 행동을 했을 땐 “내가 사람을 참 잘 봤다. 나중에 우리 회사에서 연봉 1억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J도 “일을 정말 잘한다. 어디에 가든 잘할 것이다”라고 추켜세웠다. 난 칭찬이라고 생각해 기분 좋게 받아들였고, 잠깐이지만 이들과 함께 하는 비전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스톡옵션 등 제시한 혜택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며, 어쭙잖게 수평적인 조직을 시도하다 이도 저도 아닌 문화가 되고, 직접 채용한 직원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다가 엉뚱한 방식으로 해고하는 걸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사실 이런 건 정말 별일이 아니었다. 일한 만큼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 '신뢰'와 '열정', '미래'를 운운하며 급여 이상으로 조직에 헌신하는 것, 알아서 눈치 봐야 하는 것, 때로는 상사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까지 수행해야 하는 것. 일터에서 겪을 필요가 없는 일을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노동법이 있더라도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법에서 세세히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은 갑의 자율성에 맡겨야 한다. 그 속에서 잘 버티는 사람과 버텨내지 못하고 튕겨 나간 사람으로 나뉠 뿐이다.


앞으로 뭘 할지 생각했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고, 또 언제 돈이 들어올지 불투명했다. 그래서 해고 절차의 적법성을 따져 합의금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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