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청에 출석했고, 진술 끝에 해고예고수당을 받기로 했다. 유쾌하게 느껴지는 과정은 아니었으나 짧은 사회생활을 통해 배운 것이라면,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도 내 권리를 위해 나서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형사 처분을 원하느냐고 묻는 감독관에게 수당이 들어오지 않을 시 고소장을 작성하겠다고 답했다. 의사를 전달받은 M은 나와 따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얼른 파스타를 먹고 싶어 거절했다. 절차를 마치고 혼자 크림 파스타를 먹다가 통장에 합의금이 들어온 걸 확인했다.
역시 일 안 하고 받는 돈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며 M을 떠올렸다. 며칠 전, M은 노동청에서 연락을 받은 뒤 전화를 걸어왔다.
"솔직히 바로 법률로 넘어간 게 좀 서운했어요. 법은 최후의 수단인데... 제가 일할 때 잘 못해준 건 없잖아요? 진표 님이 서운한 게 있으니까 이렇게 하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서운한 게 있으면, 제가 리더로서 놓친 부분이 있으면 좀 들어드리려고요. 말씀해 보세요."
"아, 뭐래. 듣고 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런 얘기는 해고하기 전에 했어야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는 건 상대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는 행위잖아요. 서로에게 서운한 건 지금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뭘 원해요?"
"최대한 좋게 해결했으면 좋겠어요. 위로금 명목으로 금액을 더 얹어 드릴게요."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해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그런데 이런 법률적인 부분까지 다 애초에 계산하신 뒤 결정하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사업을 하는 한 명의 대표면서 왜 고려하지 않았어요?"
"일하시는 동안 제가 부족한 것 없이 해드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법률적인 문제로 불거질 줄 몰랐어요. 수습 기간에도 월급을 후하게 쳐 드렸잖아요. 참 서운하네요."
관련 경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난 수습 기간부터 실수령 300만 원에 가까운 월급을 받았다. 스타트업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금액이었다. M은 학력이나 경력보단 그 사람의 잠재력, 성장 가능성처럼 내면의 진짜 가치를 봐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경력이 많지 않은 다른 영어 강사분께도 월 500만 원 정도의 급여를 책정해 놀라움을 줬다.
난 M이 모두 장기적인 비전과 계획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본인 사업인데 바보처럼 앞뒤 재지 않고 결정하는 건 아니겠지. M은 실력 있는 개발자 출신으로, 꼼꼼히 리드해 유명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운하다는 얘길 듣자 시야가 좁아 바보 같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군요. 서운하시군요..."
추후 M은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원만히 합의했다. 입금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J로부터 ‘항상 잘 지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동안 고마웠고 앞날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앞으로 볼일 없었으면 좋겠으니 연락 좀 하지 말라는 답장을 작성하다 멈췄다.
노동청 출석 전, 우연찮게 한 구직 사이트에서 내가 임하던 직무를 월급 200만 원으로 낮춰 올려놓은 채용 공고를 봤던 터였다. M이 턱턱 제시했던 높은 월급은 갓 창업한 젊은 대표의 허세 또는 이상에 가까웠고, 그들도 사정이 어려웠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또 둘 다 끝까지 좋게 마무리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사람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지만 그들이 좀 더 덕망 있게 행동했다면 끝이 좋지 않았을까. 아니면 혹시 내가 좀 더 유능했다면, 싹싹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아쉬움에 가슴이 답답했다.
파스타를 앞에 두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지? M과 J가 어떤 의도로 나를 대했건, 행동이 내게 아쉬움을 남겼건, 행여나 결과가 다를 수 있건 말건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할까.
해고를 당한 건 부끄러웠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원하던 기대만큼 결과를 내지 못한 게, 또 여기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속상함에 잠긴 내 모습까지 전부 다. 한동안 마음은 일시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들에 대한 집착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깨달아야 한다. 상황을 추스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좋은 결과가 있어야 남들에게 떳떳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우스운가. 살다 보니 더 노력했다고 해서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고 덜 노력했다고 해서 결과가 나쁜 것도 아니며, 좋은 결과를 통해 더 배운 것도 아니고 실패를 통해 덜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는 그저 사람들의 분별일 뿐, 스스로 그걸 답습해 속상해할 가치가 있는지 자문했다. 그저 삶의 모든 단면을 끌어안은 채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책이나 영화에서 힘든 일을 겪은 주인공이 우울함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건 흔한 전개며, 이는 결말에 극적인 뉘앙스를 더한다. 주인공은 좌절을 딛고 원하던 꿈을 이뤄 보는 이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하지만 난 마냥 우울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는 세상을 향한 오기도, 이조차 모두 성공을 향한 의미 있는 과정일 거라 여기는 정신승리도 아니었다. 분한 일을 겪었을 때 받아들이지 못하고 좌절하는 건 '난 이런 일을 겪어선 안 된다'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나라고 이런 일을 겪으면 왜 안 되는가? 세상에 모두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특별한 존재는 없다. 때론 열심히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단지 지나간 회사 생활을 돌아보며 내가 잘할 수 없던 걸 인정하기로 했다. 난 타인의 언어를 익혀 환심을 사는 소통에 서툴렀다. 눈치를 보며 남들과 나를 자꾸만 같은 선상에 맞추는 게 싫었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거부감을 느꼈으며 싫은 관계 속에서 웃으며 갈등을 풀어나갈 줄 몰랐다. 도무지 조직 생활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딘가 입사하기 전에 진작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삶에선 나 자신을 지불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배움이 있다.
한참 고민했다. 이런 성향은 나의 타고난 결함일까? 열심히 노력해서 고쳐야 할까?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어딜 가나 사람들의 비위를 매끄럽게 맞추는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을 한심하다고 여기지만, 자꾸만 가면을 쓰다 보면 마음에 걸리는 문제도 그냥 넘어가자고 스스로를 달래기 마련이다. 그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결코 좋지 않다. 작은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잘못된 관행으로 굳어지고 여러 피해자를 낳기도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눈치 속에서 대충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가? 사람은 좋지 않은 것에도 기민하게 대응하고, 나 자신을 위해 진짜 좋은 것이 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앞엔 단순히 두 갈래 길이 보였다. 첫 번째는 모난 면을 깎고 다듬어 그래도 조직 생활을 하는 것. 두 번째는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가 되는 것. 두 번째 길이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첫 번째는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하기 싫을뿐더러 잘 못하는 걸 알았으니 이젠 그 길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회사 생활을 포기하고 프리랜서를 하기로 했다. 지방대 철학과를 졸업한 29살 여자가 하기엔 어처구니없이 무모한 결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