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표 Sep 24. 2022

상처는 살아가는 데 좋은 재료가 된다


명함이나 소득 같은 것들로 증명하긴 어려우나 지난한 20대를 보내며 느낀 깨달음이 있었다. 더 나은 시작을 위해 그 깨달음을 조금씩 정리하기로 했다. 머릿속 엉켜 있던 생각들을 활자로 끄집어내고 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윤곽이 잡힐 것 같았다.




대학생 때 생활이 너무 권태로워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한 학기만 있다 오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중국은 꽤 매력적인 국가고, 저 시간은 내 일상을 온전히 뒤바꿀 정도로 길었다. 한국어보다 중국어를 훨씬 많이 쓰고, 중국 음식을 좋아하고, 중국 노래와 영화를 감상하곤 했으니.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르바이트로 중국인 고객들에게 위스키를 파는 일을 했다. 일은 바쁘지 않았고, 무료할 때면 고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한 번은 한국에서 가이드로 일하시는 중국인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분은 한국에 살면서 그동안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셨다. 만난 한국인들은 모두 무례했고, 중국인들을 무시하며 어떻게든 돈을 뜯어낼 궁리만 했다는 이야기였다. 한번 시작된 하소연은 끊이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중국인이 더럽고, 가난하고, 촌스럽다는 편견을 갖고 있지만 중국인 인구가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함부로 단정 짓냐는 등 열변을 토하셨다.


사실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을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선 예전에도 들은 적 있었다. 한국 유학을 다녀왔던 한 중국인 친구는 한국인들이 자신을 다짜고짜 짱깨라고 부르거나, 중국인들은 잘 씻지 않는다고 놀려서 당혹스러웠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갖는 우월감은 사소한 대화 속에서도 쉽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도 중국에 살 때 중국인에게 질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날 보고 신기하다고 함부로 사진 찍었고, 월급이나 애인 유무처럼 개인적인 질문을 마구 해댔다. 모르는 남자들이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봐 곤혹스러웠던 적도 많았다. 내가 중국어로 생각을 표현할 때면 나보다 중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발음을 일일이 지적하며 무례하게 가르치려 드는 이도 있었다.


한 번은 답답한 마음에 친해진 중국인 친구들에게 이곳 생활이 즐겁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털어놨다. 우습게도 그럴 때면 항상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모든 중국인들이 다 그렇진 않아. 중국엔 좋은 사람이 더 많아.”

그래, 현실적으로 그 많은 중국인들이 어떻게 다 그렇겠니? 하지만 내가 겪었던 사람들은 저랬고, 그것 또한 중국의 일부인 걸. 내 입을 막아버리는 그들의 답변에 난 더 이상 진심을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다 좋은 척, 행복한 척 사람들에게 맞춰주는 법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줄곧 한국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던 그 아주머니는 한국인들의 편견이 심하다고 욕하면서도, 그동안 만나본 몇몇 사람들로 한국 전체를 단정 짓고 있었다. 자신이 중국에 살 때 얼마나 높은 사회적 위치에 있었는지 등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이 한 걸 보면 자격지심도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난 이해할 수 있었다. 외국인 여자가 낯선 땅에서 홀로 살아가며 어떠한 일들을 겪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사람들에게 입은 상처로 마음이 다친 사람에게 논리적인 충고는 필요 없다. 아주머니가 내게 한국과 중국 중 어디가 더 나은지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쟁을 시작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미소를 띠며 답했다.

“한국 사회가 아직 나아가야 할 부분이 많죠. 많이 힘드셨을 텐데 이렇게 한국어도 잘하시고 일자리도 찾으신 걸 보면 성격이 참 긍정적이신 것 같아요. 이제는 좋은 사람 많이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웃으시며 원래 사회 변화란 천천히 이뤄지는 것 아니겠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한국 사회를 기대한다고, 세련된 한국 문화를 배워가서 중국인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공감과 위로는 거친 감정을 쉽게 누그러뜨린다.


해외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이 없었다면 난 “모든 한국인들이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 감정적으로 생각하시네요. 한국 정도면 굉장히 살기 좋은 나라예요. 아니면 그냥 아줌마가 운이 좀 나빴나 보죠.”라고 말하는 사람이 됐을 수도 있다. “젊을 때 힘든 건 다 쓸모가 있으니 사서 고생하라"라는 식의 뻔한 얘기를 싫어하지만, 훨씬 다층적으로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쓸모가 있는 건 맞다. 이는 돈으로 환산할 순 없지만 살아가는 데 중요한 재료가 된다. 피해를 입은 경험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잠시 생각했다.

이전 14화 스타트업은 다니지 않는다 下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