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성격 탓에 원체 일상이 평안하게 흘러가지 않지만 해외에서 지냈던 시간은 유독 굴곡졌다. 학생 때부터 낯선 곳에서 살아가듯 여행하는 걸 좋아했으나 실제로 살아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점이 많았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가끔씩 맞닥뜨리는 부당함은 그 좋은 기억을 모두 잊게 했다.
해외 생활에서 가장 진지하게 마주한 건 안타깝게도 성적인 대상으로 인식되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내 모습이다. 낯선 땅에서 여자 혼자 지내다 보면 남자들의 유혹에 금세 질리게 된다. 알고 보니 아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와 진지한 관계를 원한다”고 고백하는 유형의 남자들을 꽤나 겪어왔다. 사소할지라도 그런 일이 반복되면 나중엔 낯선 남자가 말만 걸어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원하지 않는 대상이 성적으로 다가올 때 혐오를 느끼는 감정은 이해받기 힘들다. 흔히 이성에게 유혹을 많이 받을수록 그 사람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난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다가오는 이들에게 큰 불쾌함을 느끼곤 했다. 모두가 나의 선을 지켜주길 원한다면 지나친 욕심인 걸까.
이슬람 문화권이자 고급 휴양지로 유명한 C국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추운 기운이 남아있는 봄에 떠났다가 한국에 돌아오니 매서운 겨울바람이 나를 에워쌌다. 급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오들오들 떨었다. 어느덧 그 더운 곳에서 사계절에 상응하는 시간을 보낸 게 실감 났다.
다른 문화권에선 누군가가 내 마음에 불편함을 안겨주는 순간이 더 자주 찾아오며, 가끔 마음속 패인 자국으로 남는 상처가 생길 때도 있다. 괜한 문제 삼지 말자는 생각에 그냥 넘겨버리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는 묵직한 불편함. 어느 날, 각인된 흉터를 바라보다 문득 되뇌었다.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상황을 재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자고.
근무 중 남자 동료 한 명이 다가와 넌 몸매가 정말 좋다고, 네 방에 놀러 가고 싶다는 말을 건넨 적 있었다. 평소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여자 친구가 되어줄 수 있냐고 했던 친구였고 난 그때마다 적당히 거절하고 회피하곤 했다. 이곳에서 나보다 훨씬 오래 일한 현지인 동료를 적으로 두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우리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어떤 말들은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상사와 동료의 상사에게 미팅을 신청해 근무 중 일삼는 언행이 도를 넘었으니 그대로 두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드렸다. 이후 매니지먼트 측에서 다른 여자 직원들에게도 몇 차례 진술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그는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경고 레터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비슷한 전적이 많은 게 고려된 것 같았다.
이후 이 나라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비슷한 문제를 걸고넘어져 누군가를 해고에 이르게 한 적이 몇 번 더 있다. 그중에는 부사장 급인 Second Manager도 있고, 총대표에게 직접 찾아가 미팅을 신청한 적도 있으며, 공식 사이트에 파장이 큰 글을 쓰기도 했다. 틀린 걸 바로잡는 건 그나마 일상 속 숨통을 틔워주었다.
주위 사람들은 너한테 도움이 되는 게 없는데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고, 비슷한 일을 겪고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회사 생활에 흠집이 날 수 있으며, 당사자와 관계를 망치면 앞으로 껄끄러울 것 같다고 했다. 무엇이 현명한 대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 업무상 잘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웃으며 관계를 유지하는 건 날 천천히 망가뜨린다. 퇴사를 한 뒤에도 마음이 병들고, 오랜 시간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 조처하면 비교적 담담하게 털어낼 수 있다. 마음에 드는 결말은 나 혼자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과정서 나는 건강해진다.
직급을 이용해 누군가가 나를 함부로 대했을 때 그저 상처를 받아 앓는다면 그건 홀로 겪는 아픔이 된다. 허나 문제를 걸고넘어지고, 모두에게 알려 대응을 요청한다면 그건 조직 내 공동의 문제가 된다. 상대가 잘못한 게 명백한 상황인데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곳에는 미래가 없다. 세상엔 수많은 공동체가 있다. 사람을 좀 더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 일상을 꾸려갈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가 아니면 안 되겠다’며 조직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는 사람을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웃으며 할 말을 삼키는 게 사회생활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통을 공동의 언어로 표현하면 리스크와 해결의 여지가 동시에 따라오지만,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평화롭고 폭력적인 일상만 흘러가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았다. 홀로 화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