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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표 Nov 06. 2022

타인을 마음껏 실망시킬 수 있는 자유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는 개인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흔히 삐뚤어진 범죄를 다룬 작품에서 범죄자의 불행한 가정사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다.


난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릴 적 다락방이 딸린 좋은 이층 집에 살기도 했고, 시장통에 있는 작은 빌라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아빠가 바뀌었고, 언니는 우울증이 심해 몇 번씩 자살 기도를 했다. 부모님은 학업을 포함한 내 인생의 청사진에 신경을 전혀 써주지 못해 중요한 결정은 모두 스스로 내려야 했다. 난 나를 보며 생각했다. 부족한 가정에서 무관심하게 방치되며 자랐다고. 반면 친구들의 부모님은 늘 그들의 삶에 애정으로 관여하는 듯했다.


매체에 등장하는 좋은 아파트와 승용차, 자녀 교육에 빠삭한 엄마와 무심하지만 든든한 아빠로 대변되는 '정상 가족'의 삶은 나와 거리가 멀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뭘 하든 큰 기대를 보인 적도 없고 반대한 적도 없다. 그래서 그럴까? 난 잘난 자식은커녕 못난 자식에 가깝게 자랐다. 살면서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성과를 안겨준 적이 딱히 없다. 대입에 실패했고, 좋은 직장에 다니지 않으며, 멋진 남자 친구도 없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예쁜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내게 남겨준 것이 있다. 바로 타인을 마음껏 실망시킬 수 있는 자유다. 회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다는 나를 두고 엄마는 말했다.

"나도 보험 회사에 다닐 때 성격에도 안 맞는 영업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한 번은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일하기 싫어서 엉엉 울었어. 그만두고 다른 일하니까 진짜 좋던데. 안 맞으면 그만둬도 된다."

언니는 말했다.

"야, 난 이혼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별일 아니라고 하니까 진짜 별일 아닌 것 같아. 안 맞아서 회사 생활 포기하는 건 정말 별일 아냐."

일하다 때려치우고 싶어서 상사를 때렸다는 나를 보곤 웃으며 "넌 돈 벌러 갔으면서 왜 자꾸 전투력만 길러서 오니?"라고 말할 뿐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어느 누구도 살면서 내게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한 적 없단 걸. 엄마는 실질적인 가장으로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아무 문제없이 잘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던 것 같다. 그리고 문제가 많아 보이는 내 모습에 대해서도 고쳐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조직 생활에 무척 서툴고, 하기 싫은 일을 묵묵히 하는 끈기가 없다. 괜찮은 여자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사근사근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이 딱딱하다. 인맥 관리나 명품처럼 또래들이 열을 올리는 것에도 무관심하다. 스스로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 남들을 따라가기 위해 인생을 쓰고 싶지 않다. 누군가에겐 매력 없고 지루한 사람으로 비칠 수 있으나 이건 그냥 내 모습이다.


우리 가족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나아갈  있는 힘을 줬다.  언제든 실패를 인정할  있고, 하고 싶은 일에 마음껏 도전할  있다. 싫은  이것저것 재지 않고 그냥 싫다고 말할  있다. 살다 보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신감은 나를 이루는 근간이 됐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는 사람은 여러 잣대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어 본다. 그런 사람 옆엔 현재의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고 각종 기대를 투영시켜 바라보는 이가  있다. 자식에게 쏟은 만큼 결실을 거두길 바라는 부모 같은 사람 말이다. 한때는  인생에 정성스레 투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결핍처럼 느껴졌으나 이젠 아무렴 상관없다. 삶은 다양한 형태로 교훈을 남기고,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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