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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표 Jul 20. 2020

더 이상 가지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 존재에 대하여

최근 소중한 이로부터 한 질문을 받았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과연 목표치만큼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해서 잠이 안 와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 인정받고 싶은데 그게 안 되면 비참해지는 기분이에요. 그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사실 이는 나의 오랜 고민이기도 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니 나름의 결론과 함께 전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남들에게 미친 듯이 인정받고 싶을 때가 있었다. 오랜 시간 고립된 경험이 있었기에 뭔가 잘 해낼 자신이 없었고, 달콤한 칭찬과 타인의 박수가 절실했다. 여기서 더 만족할 수 없다고 나를 채찍질하며 달렸을 때 누군가의 인정은 자존감을 채우는 것 같았다. 사실 넌 별거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이 쓰라렸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삶이 풍성해지는 걸 느꼈다. 행복했고, 괴로웠다. 원래 행복이란 그만큼 고통스러워야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과 타인의 기대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됐다. 버티지 않아도 행복했고, 굳이 무언가를 더 가지지 않아도 자유로웠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더 좋아진 건 딱히 아니었다. 다만 집착하지 않고 비워내는 사유가 나를 서서히 해방시켰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수많은 비법서가 혼재하는 시대를 살고 있고, 그만큼 스스로의 명확한 답을 내리기 힘들다. 나 또한 다양한 가치 속에서 때론 답을 몰라 휘청거린다. 그래도 아끼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조언해줄 수 있는 게 있다. 삶 속에서 소유보다 존재가 풍성해지는 방식을 늘릴 것.


소유와 존재를 명확하게 나누긴 어렵다. 똑같은 대상이 때론 소유가 되고, 때론 존재가 된다. 다만 소유는 마음을 조급하게 한다. 존재는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뜻대로 나아가지 않아 화가 나는 것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고, 흔들리는 모습조차 그 사람의 일부로 긍정한다면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고 싶은 구두를 당장 결제하지 못해 마음이 조급하다면 소유를 늘리고자 하는 것이고, 사고 싶지만 실은 이게 없어도 충분할 것 같다면 존재만으로도 온전한 것이다. 바라는 목표가 내게 닿지 않을까 초조한 마음에 잠 못 이루는 것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과 함께 감히 예측할 수 없는 것까지 바라는 오만함이다. 목표가 있으나 조급해하지도, 잊어버리지도 않고 나아가고 있다면, 과정 속에서 충만히 몰입한다면, 그래서 목표가 실제로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마음에 다다른다면 존재로써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내게 소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욕심, 화려한 귀걸이를 잔뜩 수집하고 싶은 마음, 자꾸만 성장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서 온다. 존재를 풍성하게 하는 건 주로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몰입해 행복을 낳을 때의 순간들이다. 이를 테면 가르치는 학생들이 활짝 웃을 때, 사심 없이 타인에게 가진 것을 줄 때, 수영이 끝나고 반쯤 젖은 머리로 나와 피부에 닿는 바람을 느낄 때, 막연히 생각하던 것들을 선대의 누군가가 이론으로 잘 정리해 놓은 것을 발견할 때.


존재의 행복은 일상 속에서 내가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 소유의 행복은 노력과 함께 여러 조건이나 타인이 가진 것들이 개입하기에 집착하다 보면 공허함이 따른다. 소유가 곧 그 사람의 존재를 드러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에 얽매이지 않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지금 내가 욕망하는 것들이 실은 소유에 대한 집착이 아닌지, 이렇게 연연해봤자 내 뜻 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게 아닌지, 그렇다면 마음을 비우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행하는 게 현명한 삶의 방식이 아닌지에 대해 말이다.


존재가 충만한 사람은 소유의 있음과 없음으로 인해 삶의 뿌리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행복은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다. 장자는 인간세에서 말한다. 행복은 깃털만큼 가볍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질 줄 모른다고. 고통과 행복을 스스로의 사유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 때 타인에게 충만한 사랑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더라도 옆에서 머무는 것이 내가 택한 사랑이다. 그러니 괜찮다는 말로 끝맺음을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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