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바다의 오롯함_제주下

오랫만에 들린 소소한 제주의 기록

by 세련

"저는 여기 있을래요"

제주도에서의 일정이 반 이상이 지났다. 여기 있으니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모르겠다. 원래도 하루하루 주말을 챙기며 살던 세상은 아니었지만 신선놀음은 이런 걸 일컫는 말 일 것 같다.

마지막 제주도의 일정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예정이었다. 제주에 내려온 지 몇 일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시간들을 쪼개고 쪼개어 정말 나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었다.


점심쯤 지인은 먼저 육지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내려주면 나는 애월 쪽에 위치한 작은 보금자리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전에 만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셨다.


시간이 조금 남아 섭지코지 구경을 했고, 산책로를 돌았다. 예전에 방문한 적이 있던 한화리조트 쪽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니 기분마저 상쾌했다. 섭지코지에 내려 조성된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산책길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점심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바닷가를 보니 바위에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고 있다. 제주에 낚시를 하러 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가끔 물속에 들어가 물속을 보고 낚시꾼들에게 여기 물고기 없다고 소리쳐 주고 싶은 기분을 받는다.


산책 로께에는 말을 방목해 두는 곳이 있다. 방목이라기보다는 긴 줄을 풀어서 개처럼 묶어두는데, 제주도만이 보는 풍경에 색다르다. 날이 따스해져 퍼져 누워있는 놈도 있고, 신나게 먹을거리들을 먹어 치우는 놈도 있다.

가까이 가니 슬그머니 고개만 들어 뭔가- 쳐다보고는 다시 눕는다. 상팔자다.



섭지코지는 바람의 땅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바람을 맞는 말이 된 기분이다. 이만큼 제주를 표현하기에 제격인 곳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섭지코지는 제주를 닮아 있었다. 제주에 온 기억이 또렷한 고등학교 수학여행 시절에 왔던 곳 중 하나인데, 이제는 조금 달라진 모습에 아쉬움이 휘 남는다. 뭔가 잔뜩 산책로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느낌. 그래도 잠깐 바다를 보니 시원한 마음이다.


시간이 되어 공항으로 이동했다. 울창했던 삼나무 길을 지난다. 공항을 만든다며, 개발을 한다며 베어낸 나무들이 처참하다. 바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스산한 느낌의 길을 따라 공항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조용한 내 작은 휴식처_ 자발적 고독"

공항에서 지인과 헤어진 후 애월로 이동했다. 애월은 예전부터 제주도에 오면 자주 가던 곳이라서 꽤나 마음 편하게 있는 곳이다. 나름 발전도 많이 되었고, 관광객이 워낙 많은 동네긴 하지만 가장 좋아했던 협재해수욕장의 기억도 있고- 요즘 한창 핫하다는 한담 해변도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갔다가 질색을 하고 돌아왔다.)


애월을 따라다니는 올레길 코스- 해변 도로도 멋지다. 내가 애월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예전에 친구들과 다니던 추억이 많은 곳이 이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함께한 좋은 사람들, 빛나는 태양, 시원한 바람, 웃음, 완벽한 날씨의 제주. 그래서 내가 제주를 좋아한다. 추억이 덕지덕지 묻은 곳이기 때문에. 한 편으로 제주는 안 좋은 기억도 덕지덕지 묻은 옷이기 때문에 슬프면서도- 힘들 때면 이따금 생각이 나는 휴식처 같은 곳이다.



애월에서는 작은 집을 빌렸다. 제주 특유의 집 구조로 지어진 펜션인데, 작게나마 있는 정원과 넓은 주방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육지의 집에 있을 때는 주방에 잘 들어가지 않는데, 이상하게 어딘가를 가곤 하면 예쁘게 꾸며진 안락한 주방이 있는 집을 고르게 된다. 아침에 잠깐 토스트 한 장 구워 정원을 바라보는 묘한 느낌을 받고 싶어서 일까.


바깥을 자주 나갈 것 같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겠구나 싶었는데 바깥에 나간 일이 더 적다. 그리고 바깥에 나가서 있던 기억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별로 특별한 기억들이 아니었구나 싶다.

나의 작은 휴식처는 정말 고요한 곳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정원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있으면 햇 빛이 한가득 정원에 내리쬐었다. 하늘은 파랗고, 볕은 따뜻하고. 의자에 기대어 잠깐 맥주를 들이켜고 있자니 자발적 고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세상과 단절된 이 느낌. 누구도 나를 찾지 않고 내가 어느 곳에도 기대감 없이 있을 수 있는 곳.


그저 이 곳에 앉아있을 때 나는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 서로에 대한 기대감도, 누구를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도 된다. 이 날씨와 기분과 노래와 향까지, 모든 내가 느끼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다. 내가 느끼는 것들을 누군가도 알 수 있었으면- 하면서도 마찬가지로 그저 내 안에서 삭히기를 바랄 때도 있다.

숙소 근처에는 조금만 걸어가도 바다가 펼쳐져 있고 유채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관광객도 없는 작은 동네라 한적함마저 깃들어 있다. 바닷가에는 벤치가 몇 개 놓여있었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보았다. 물은 신비롭게도 멍 때리고 보면 빨려 들어가는 힘이 있다고 한다. 항상 자연 앞에 서 있으면 느끼는 이 감정이 참으로 아련하다.

온전히, 이 곳에 나는 존재하고 또 살아가고 있다. 한 참을 그렇게 바람을 쐬고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거대한 자연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하나의 숨 쉬는 삶이기도 하다.

첨예한 두 감정의 안에서 내가 하는 것은 단단히 땅에 발을 딛어내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최선이다.



밤이 깊어 정원에 앉으니 밤바람이 꽤 차다. 고요한 동네, 정원에 작은 등불이 켜져 있으니 숨이 깊어지는 느낌이다.

오래간만에 실컷 바깥에 앉아 온 몸에 공기를 채워 넣는다. 답답한 것들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안녕, 제주"
제주의 마지막 날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돌아가기 싫기도 하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생각보다 오랜 기간 머물렀기 때문이리라. 아침에 일어나 마지막으로 정원에 앉아 제주의 기운을 느껴본다. 여전히 처음과 같은 느낌으로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과 고요함이 한가득 하다. 집은 반 절 짜리 였는데, 나중에 여러 명이서 이 곳에 온다면 그때는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봤다. 그것 나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


이제 정말 나서야 할 시간이다. 내 작은 집에서 떠날 준비를 했다. 짐들을 싸고 서울에 올라가면 춥지 않을까 싶어 옷도 단단히 챙겨 입는다. 일주일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캐리어가 터져나갈 듯이 짐이 많다. 유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가끔 이런 유소유가 과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그때뿐이다. 물건들을 다 챙기고 다시 한번 두고 간 게 없는지 체크하고 집을 나선다.


애월의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파란 바다가 그립다. 어쩌다 보니 또 제주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와 기억이 조금 더 퇴색되어버리기 전에 글을 썼다. 글을 쓰면서 다시 제주를 곱씹자니 내가 실제로 겪은 것보다 더 격하게 감정을 느낀 순간도 있었고 그 당시는 감격스러웠으나 막상 되돌아보면 잊힌 순간들도 많은 것 같다.


다시 갈 제주는 또 많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내가 바뀌듯, 세상도 변한다. 하지만 그때도 마찬가지로 내가 느꼈던 제주의 공기, 바람, 기운 그리고 그 감정은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증스러운 곳. 그럼에도 그리운 곳.




제주는 나에게 과거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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