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던 밀크티

밀크티 하나에 온갖 생각들을 했던 일상 에세이

by 세련

"밀크티 중독자"

가끔 친구들과는 밀크티에도 마약성분이 들어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를 나누곤 한다. 밀크티는 중독이다.

언제부터였나 갑자기 밀크티가 엄청 먹고 싶은 시기가 왔었다. 이유 없이 굉장히 밀크티가 먹고 싶어 지더니 한 번 맛을 본 이후로는 1일 1 밀크티를 하게 된다. 정확히는 흑당 버블 밀크티지만.


반년 전쯤이었나, 갑자기 흑당 밀크티가 엄청나게 유행을 했다. 국내의 간식거리 프랜차이즈는 시즌마다 유행이 있는데, 한 때 대만 카스테라가 유행이 더니 이제는 카스테라는 보이지도 않고 흑당 밀크티가 대세다. 처음 한국에 소개된 흑당 밀크티는 흑당 특유의 맛과 달달함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타피오카*(밀크티에 들어있는 검정 젤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이 밀크티의 버블은 상당히 맛이 좋았는데, 좀 다른 방식으로 버블을 삶는다고 들었던 것 같다.


처음 공차에서 먹게 된 이 흑당 밀크티는 평소 공차의 시스템과는 다르게 당도나 얼음 양들이 고정된 음료였는데, 공차를 자주 가지 않던 사람들에게 이 메뉴는 상당히 편한 시스템이 아니었을 까 싶다. 나만해도 공차를 처음 갔을 때 수많은 메뉴와 온갖 것을 선택해야 되는 시스템에 정신이 없어 한동안 공차에 발을 들이지 않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흑당 밀크티를 먹다 보니 이 흑당은 까만 설탕일 것이고, 그럼 단순히 흑설탕인데 왜 이렇게 맛이 있을지 궁금도 했다. 흑당은 정제하기 전의 설탕이라고 한다. 당밀 성분으로 인해 독특한 맛을 낸다고 하는데, 당밀 하면 또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예전에 잠시 승마장에서 일을 할 때, 말들이 자꾸 살이 빠져 걱정이었다. 사실 승마장의 고질적인 원인인 재정난이 말들의 살 빠짐의 원인이었는데 사료를 더 급여하거나 건초의 급여량을 늘리면 되지만 말이란 짐승이 워낙에 까다롭기도 하고 재정적으로 낭비가 크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아는 분께 얻어 온 서비스 제품이 바로 '당밀'이었다. 그냥 사료 위에 한 스푼씩 퍼서 뿌려주면 된다는데 냄새를 맡아봐도 단 냄새가 없었지만 끈적함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게 도대체 뭘까 하면서도 살이 찐다니 휘휘 뿌려주곤 했는데, 말들은 뭘 주던 잘 먹었다.


어쨌든, 이렇게 흑당 밀크티를 열심히 사 먹게 된 나는 어느 순간 밀크티 중독자가 되어 있었는데 요즘이 딱 그 시기다. 이런 밀크티를 파는 곳은 내가 아는 곳만 해도 수십 군데는 될 거다. 그리고 흑당 밀크티로 유명한 곳들을 찾아다니며 먹었었는데, 요새는 찾아다니며 먹을 정도는 아니고 집 근처에 '타이거 슈가'가 있어서 자주 들리곤 한다.




"일생일대의 실수"

특이하게도 이 매장은 과거 비슷한 프랜차이즈인 '흑화당' 이 있었던 자리인데, 어느 순간 없어지고 타이거 슈가(이하 '타슈')가 들어왔다. 장사가 꽤 잘되는 목인 이 가게는 지나다니다 보면 자꾸 눈여겨보게 되는 자리다. 처음 타이거 슈가를 먹었던 건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남에 있을 때 먹어봤다. 건강검진으로 강남 근처에 갈 일이 있었는데, 동생이 마침 얘기를 해줘서 먹을 수 있었다. 대기라인과 줄 라인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는데 후다닥 뛰어서 줄을 서니 15분 정도 기다리고 음료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너무 핫해서 줄을 기다려서 까지 먹을 맛은 아니다-라고 동생과 평가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타슈는 타피오카를 보바 (큰 알) 스타일과 쩐주 (작은 알) 스타일로 먹을 수 있는데, (혹은 보바+쩐주도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큰 알이 많던 버블티만 먹다가 쩐주 스타일을 먹었더니 이게 좀 적잖이 희한한 느낌이었나 보다. 개구리알 같은 느낌을 받던 쩐주는 대충 호로록 먹는 맛도 있고 오돌도돌한 느낌이 나는 느낌도 좋았었다.

어쩌다 보니 타이거 슈가 홍보자가 된 것 같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밀크티는 사랑이니까.


또 다른 유명 밀크티인 더 앨리도 가 보고 싶었다. 다만 아쉽게도 대만 현지에서는 모든 밀크티가 품절되어 먹을 수 없었고 국내에 와서는 나의 동선과 겹치는 곳이 거의 없어 가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저녁께 에 요가 수업이 있어 요가원들 들렸다가 집에 오는 길이면 항상 밀크티의 유혹에 고민을 하게 된다. 약간 돌아서 집에 가야 하지만 3분 내외의 거리에 밀크티가 있다는 건 나에게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열심히 기껏 요가를 해서 힘들게 빼놓은 나의 살과 건강들을 밀크티와 바꿔야 하는가- 싶은 고민은 다이어터라면 누구나 다 고민을 해봤던 일일 것이다.


평소라면 어느 정도 무시하고 갈 수 있었을 터였는데, 그날따라 유혹이 너무나도 심했다. 저녁식사를 하지 않은 공복이었기 때문에 더욱 먹고 싶었다. 한참 고민을 하다 '하루쯤은 괜찮지 뭐!'라는 마음으로 밀크티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볍다. 도착한 밀크티 집에서 익숙한 어조로 주문을 했다. 밀크티가 나오는 동안 친구들에게 신나게 밀크티 먹는다는 자랑을 한다. 다들 자기도 밀크티를 먹고 싶다고 난리다.


곧이어 나온 밀크티는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잘 흔들어서 드세요~'라는 말과 함께 컵홀더와 빨대를 챙겨준다. 마시면서 집에 가고 싶지만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와 착용한 마스크로 인해 집에서 먹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사러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이라는 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다는 둥의 생각을 하며, 오늘의 저녁식사를 소중히 끌어안고 집으로 간다. 이때만큼은 세상 어느 부자도 부럽지 않다. 간절히 먹고 싶던 음식을 먹으러 가는 기분은 어떠한가. 아마 택배를 받기 전 택배 아저씨가 택배요!라고 말할 때, 택배 상자를 뜯을 때 가장 행복감이 고조된 것과 비슷할 것이다.


...........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 날의 일생일대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가치 있던 밀크티"

직원의 잘 흔들어서 먹으란 얘기가 문득 머리를 스친다. 흑당 밀크티를 바라보고 있자니 미리 흔들어서 섞어놓고 싶은 충동이 든다. 어차피 집에 가서 먹으려면 흔들어 놓아야 하고, 위에 밀크폼을 얹었기 때문에 지금 흔들어 놓지 않으면 차가워진 밀크티 탓에 잘 섞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흔들흔들- 얼음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동그란 보석 같은 타피오카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인다.

행복한 마음으로 조금 더 세게 흔들어 벽에 붙은 흑당까지 예쁘게 섞이길 바란다. 그 순간 밀크티가 내 손을 벗어났다.


'앗......!!'

잡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밀크가 떨어지는 그 찰나에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지 않았다. 밀크티를 사기 위해 요가원 엘리베이터에서 고민하던 순간, 고민 끝에 큰 마음먹고 밀크티 집으로 달려가던 순간, 씰링으로 밀봉되어 있으니 떨어뜨려도 괜찮을 거야 라는 생각, 이런 젠장! 머릿속으로 욕지거리가 오간다.


그래도 가장 큰 소망은 '제발!!!!!!'이었다.

그리고 땅으로 추락한 밀크티는 그 형상이 끔찍하게도 터져버리고 말았다.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엔 아까 흔들며 즐거워했던 타피오카와 얼음들, 그리고 예쁘게 섞여 베이지 빛깔이 된 밀크티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황급히 컵을 주워 들었지만 남은 거라곤 버블 몇 알과 얼음 한 조각. 어떻게든 먹을 수 있는 게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 봤지만 이미 컵이 처참히 깨져 주워 담을 수 조차 없다. 아, 이건 액체니까 애초에 주워 담을 수가 없지 않나. 3초 전에 주우면 괜찮다는데, 주울 수 없다. 뜯지도 못한 빨대와 끼우지 못해 갈 곳을 잃은 컵홀더가 덩그러니 손에 남아있다. 예전에 스타벅스 쿠폰을 선물 받아 인증샷을 찍어 보내준다고 사진만 실컷 찍다 한 모금도 못 먹고 떨어뜨린 기억이 났다.


돈도 돈이었지만 나의 기대감이 너무 컸나 보다.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보낸 밀크티가 안타깝다.

집에 와서 멍하니 친구들에게 얘기하니 너도나도 위로의 말을 건넨다. 밀크티의 찬 기운이 손에 아직도 생생하다. 어떻게든 위안이라도 해보고자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본다.

'그래 운동하고 나서 밀크티는 좀 아니지, 다이어트 신의 계시인 거야. 다이어트 신이 뭘 먹냐고 손을 팍 때려서 떨어드리고 만 거지...'

'밀크티는 내일도 먹을 수 있다...'

'먹어봤자 아는 맛'- 옥주현의 다이어트 명언


고작 밀크티 한 잔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밀크티 한 잔에 글을 쓸 정도로 감성이 폭발해 버렸나 보다.

이렇게라도 나에게 글을 쓸 원동력과 소재를 줬으니, 밀크티는 가치가 있었다.

가치 있던 밀크티. 오늘은 비록 내 곁에 없었지만. 글을 쓰는 와중에도 떨어져 버린 밀크티가 아른하다.




"인생살이 새옹지마_ 밀크티 수습기"

그렇게 슬픔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었다. 야밤에 당한 봉변에 많은 지인들이 위로도 해주고 슬픔을 나눴다. 그 이후로 밀크티를 또 먹긴 했다. 타이거 슈가에서 먹지는 못했지만 이래저래 밀크티는 항상 내 곁에 있어주곤 한다.


그리고 글을 올린 지 3일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인스타그램 DM이 왔다.


발신자는 타이거 슈가코리아.

다름이 아니고 내가 태그 해서 올린 피드 물을 보고 연락을 한 건데, 구입 후 먹지 못하고 터져버려 옷이나 신발 등에 오염이 없었을지 걱정된 마음에서- 그리고 마음의 작은 상처에 소소하게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며 매장에서 사용이 가능한 소정의 상품권을 보내준다는 DM이었다.


터진 밀크티에 망연자실한 밤을 보냈던 나에게 그저 웃음만 나오는 일이다. 연락을 준 것도, 많은 피드 중 내 피드를 보고 연락을 준 마음이 참 고맙고 감사했다.

'인생살이 새옹지마' 라더니, 어제의 밀크티 박살이 이런 행복감으로 또 오지 않나- 떨어진 밀크티는 정말로 가치가 있던 친구였다.


나는 오늘도 밀크티를 마시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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