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로 들어섰다. 여러 현관문 중 하나가 반쯤 열려있었고 역시 402호였다. 어떻게 생긴 구조일지 전혀 가늠을 못하며 현관을 통해 안쪽을 보았고 내 기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예상했던 답답함이 전혀 없었다. 일반 오피스텔 치고 층고가 높은 구조였는데 현관, 주방, 거실이 1자로 시원하게 뚫려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옷방, 화장실, 침실이 갖춰져있어 혼자 살기에는 최적의 구조랄까.
"생각보다 넓네. 좀 둘러봐도 돼?"
"뭐 볼 게 있나ㅎㅎ 응 편하게 둘러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거실 오른편 책장에 빼곡히 꽂혀있는 책들이었다. 4단 책장에 수많은 종류의 책이 있었는데 본인이 직접 수기로 쓴 포스트잇으로 섹션을 구분해두었다.
"이거 다 읽은 거야?"
"그럼 다 읽은 책이지. 침실에도 더 있어"
침실 안에도 책장이 있었고 거기에도 수십 권의 책이 더 있었다. 한켠에는 슬램덩크 만화책 전집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동료들과 술을 먹던 중 슬램덩크 얘기가 나와 충동적으로 구매했다고. 읽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사온 후 구매한 새로운 책장에 꽂혀있는 슬램덩크와 다시 쓴 포스트잇들
신기한 마음에 책장을 연신 살펴보던 중 일전 대화에서 들었듯이 동일한 책이 몇 권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역시나 우리의 대화는 책 얘기로 흘러갔다. 그 당시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미움받을 용기였다.
"나는 진짜 그 책이 도움이 많이 됐어. 사실 읽기 전에는 그냥 그저 그런 베스트셀러 자기 계발 서적인 줄 알고 절대 안 읽으려고 했거든. 그런데 친한 선생님이 추천해 줘서 읽어보고 너무 느낀 게 많아. 특히 과거의 자신에 얽매이지 말라는 얘기. 과거의 불행했던 나이기에 나는 앞으로도 행복할 수 없다고 단정 짓고 그것 자체에 도취되어 있는 삶을 경계하라는 부분이 크게 와닿았거든"
"나도 읽었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나의 가벼운 추천담에 곧바로 핸드폰을 켜서 미움받을 용기를 주문해버리는 그녀였다.
이 여자 책에 진심이구나.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술상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일명 아인바라고 불렀다.
(앞으로 그녀의 가명을 아인으로 하겠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기에 자주 지인들을 초대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흥을 주체 못 하는 그들 덕분에 소음 민원으로 경찰이 찾아온 적도 있다고.
예쁜 잔에 맥주를 먹음직스럽게 따르고 마른안주 몇 개로 구색을 갖춰 테이블에 세팅하였다.
짠!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 사진 좀 찍을게"
술을 좋아하는 만큼, 뜻깊은 술자리를 기록하는 그녀였다. 짠샷을 찍어둔다고 했다.
다시 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내 얼굴은 금방 빨개졌다. 예전보다야 알콜에 익숙해졌지만 소량의 맥주에도 금방 반응하는 나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하하하 진짜 못 마시네. 이거 마셨다고 얼굴이 이렇게 빨개져?"
"응, 나는 알콜 한 방울만 들어가도 이렇게 돼. 조금 있으면 다시 하얘질 거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별안간 책장으로 다가가 몇 가지 문서와 카드를 가지고 왔다. 이게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라고 하며 탄자니아 여자아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제 9살이며 정기적으로 답장 편지를 보내준다고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호다인데 그녀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 쓰고 있는 로봇청소기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혀줬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의사소통한다. 호다 돌릴 때 됐는데, 호다 돌렸어?, 호다 멈췄는데 등등)
호다 사진을 찾아보니 이렇게 당근 영정사진으로.. 지금은 LG호다가 있다이야기가 무르익어가고 맥주캔은 어느덧 5캔이 비워졌다.
1캔은 내가, 4캔은 그녀가. 어림잡아도 4배의 알콜용량차이.
술 못 먹는 남자와 술 잘 마시는 여자, 과연 잘 만날 수 있을까?
"1캔은 넣어두자. 나 이제 졸려, 이제 12시 다 됐는데 집에 어떻게 갈 거야?"
"뭘 집에 가. 그냥 여기 있을래"
"집에 안 간다고? 나 졸리다니까"
"여기서 잘게"
"그래 니 맘대로 해라. 여기 소파에서 자. 이불 줄게"
"응"
알큰하게 취한 우리의 밤이 그렇게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