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보기

by 전야감

뇌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뇌를 연구하는 이유는 그 메커니즘을 밝혀 활용방법을 매뉴얼화하여 더욱 명료한 목적으로 예측가능범위내에서 뇌를 이용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뇌의 특징 중 하나는 비슷한 정보는 압축하여 저장한다는 것. 그래서 비슷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비슷한 일상이 하나의 카테고리로 저장 돼버리니 그러는 수밖에. 그럼 이것을 카운터 하는 방법은 비슷하지 않게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말로 낯설게 보기. 우리가 처한 장면과 관계와 감정을 낯설게 조작해 보는 것이다.


인간은 너무도 위대한 동시에 지극히 단순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밝혀놓은 다양한 법칙이 우리에게 꽤나 잘 먹힌다. 낯설게 보려고 한다고 그리되겠어? 그리된다. 그리고 반복을 통해 더 익숙하게 만들 수 있다.

-


수능이 끝난 고3교실은 좋은 말로는 화기애애, 나쁜 말로는 초토화이다. 학교의 풍토, 교사들의 역량에 따라 그 모습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쉽지 않다는 것은 대부분의 교사가 공감하리라. 그래서 겨울 방학 전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그들을 distract 하기 위해 애쓴다.


저번주에는 그 프로그램 중 하나로 향토탐방을 떠났다. 쉬운 말로 주변 걷기이다. 역시나 수많은 학생들이 오전 조퇴를 감행하였다. 향토탐방에 참여하면 더 일찍 집에 갈 확률이 높다고 설득하여도 끄여이 교실에 남겠다는 일부 학생들을 뒤로한 채 찬 겨울바람을 얼굴로 때려 맞으며 교사들과 학생들이 걸었다.


얼마쯤 걷고, 사진을 찍고, 그들을 해산시키고 돌아오는 길, 도로 아래 다리를 지나는데 무심한 듯 튼튼한 골조의 무채색 다리의 아래모습, 그 옆으로 펼쳐진 메마른 천과 갈대의 모습이 일본 소도시 어딘가의 풍광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일본여행 중에 이런 곳 걷고 있다고 생각하면 꽤 낭만적이지 않을까요? 이런 풍경 일본에 분명히 있잖아요"


강추위에 어떤 분에게는 내 말이 귀에 닿지도 않았겠지만 몇 분은 동조하셨다. 그렇게 나는 잠시동안 일본여행을 떠났다. 그 기분, 장면을 이렇게 글까지 남겨버렸으니 이제 내 머릿속에 특별한 겨울 장면 카테고리에 조용히 정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직전, 예전에 살던 동네 카페에서 홀로 책을 읽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하루키의 이야기는 활자로 이미지와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읽으면 좋다. 활자가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그림과 묘한 감정들이 때론 차분하게, 황홀하게, 들뜨게 만든다. 그런 분위기에 휩싸여 책에 몰입하는 순간, 이야기와 너무 잘 어울리는 재즈 음악이 카페에 울려 퍼졌고, 동시에 내 옆으로는 오버핏 검은 정장에 헤드셋을 쓴 마른 남자가 휙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 완벽한 조합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오며 재빨리 이렇게 노트북을 꺼내 들어 글을 쓰고 있다. 그 웃음과 함께 고개 돌려 바라본 카페 창밖의 잿빛하늘이 그렇게도 슬프도록 황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꼬질꼬질한 동네 풍경에서는 평소 느낄 수 없는 이세계에 온 감각.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대한민국은 아닌 어느 곳이다. 그 순간의 픽 피어오른 감정의 꽃을 기록하고 싶었다.


지금 세상은 상상력 싸움이다. 내 머릿속에 무엇을 그리고 그걸 진짜라고 믿는가의 싸움이다.

나는 이 세상의 땅에 발끝을 가까스로 붙인 채 하늘로 손끝을 뻗어가는 사람이다.

무엇도 놓치지 않고 무엇도 무시하지 않는 존재이다.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비밀을 끌어안고 오늘도 살아간다.

나는 세상을 낯설게 보고 오늘도 말간 꽃을 발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가을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