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는 연기를 한다.
딱히 대단한 연기는 아니고, 그저 평범한 직장인 1의 역할이다.
오후 두 시, 가장 졸음이 쏟아지는 시간의 회의실.
공기는 탁하고, 누군가의 열정적인 목소리는 의미 없는 소음처럼 웅웅거린다.
나는 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화면에 뜬, 영문 약자로 적힌 ‘비전’이라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어보이는 단어를 보며, 나는 월급을 받는게 아니라 출연료를 받고있는걸까. 그렇다고 하면 이건 비과세소득이 아닐까. 바보 같은 생각을 한다.
세상은 거대한 무대, 우리는 각자 주어진 배역을 소화하는 배우,
문제는 내 역할이 무엇인지, 대본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눈치껏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곁눈질하며, 어설프게 따라 할 뿐이다.
잘리지 않기 위해서, 무대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연극의 감독은 누구인지, 관객은 있기는 한 건지 알 수 없다.
그저 막이 오르면 무대로 나가고, 막이 내리면 퇴장할 뿐이다.
가끔 상사의 농담에 억지로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입꼬리는 경련처럼 올라가 있고, 눈은 웃고 있지 않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면 섬뜩하다. 저게 정말 나인가. 내 안의 나는 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 표정도 없는 건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가면을 써서, 이제는 피부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 가면을 벗기위해서는 이 피부를 모두 도려내야되는것 아닐까. 섬뜩한 생각도 든다.
퇴근하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무대 뒤편으로 퇴장하는 단역 배우가 된 기분이다.
번쩍이는 조명도, 박수갈채도 없다.
그저 나와 같은 수많은 엑스트라들과 뒤섞여, 땀 냄새 나는 어두운 분장실로 돌아가는 길.
서로의 지친 얼굴에서, 오늘 하루의 연기가 얼마나 고단했는지 말없이 읽어낼 뿐이다.
집에 와서 현관문을 닫는 순간, 비로소 가면을 벗는다. 지독하게 피곤하고, 텅 빈 얼굴이 나타난다.
이 얼굴이 진짜 나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이것도 내일의 연기를 위해 잠시 쉬는 또 다른 가면인가.
정답은 없다.
그저 내일 아침이면, 다시 이 지긋지긋한 가면을 고쳐 쓰고 무대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어쨌든 연극은 언제끝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계속되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