펴보지 않은 논문

by 야호너구리

인터넷 밈 중에 그런 게 있다. 이과 대학원생은 사람이 아니라고 놀리면서, 문과 대학원생은 왜 안 놀리냐고 물으면 "진짜 불쌍한 사람은 놀리는 거 아니다"라고 답하는 농담. 웃기면서도 뼈가 시린 이야기다. 그 '진짜 불쌍함'의 실체를 내 눈으로 목격할 줄은 몰랐다.


며칠 전, 이사장 차의 엔진오일을 갈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부당한 사적 지시지만, 뭐 어쩌겠는가. 차 맡겨놓고 PC방에서 게임이나 한 판 때리고 오면 그만이다. 흔쾌히 다녀왔다.


차를 갖다 바치니, 이사장 옆에 낯선 젊은 여자가 있었다. 이사장은 그녀를 "내 애인"이라고 소개하며 낄낄거렸다. 저질스러운 농담. 그 여자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밥이나 먹자기에 따라갔다. 불편했지만, 이것도 사회생활의 연장선이니 밥이라도 얻어먹는 게 남는 거다.


이사장은 먼저 식사를 마치고 나갔고, 나는 남은 밥을 우걱우걱 먹고있었다. 그 여자는 식당에 남아 이사장 술자리에 가져갈 안주 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식당 주인 할머니가 높은 선반의 그릇을 못 꺼내 쩔쩔매시는 게 보였다. 내가 돕겠다고 일어나자, 그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만류했다.


"식사하세요, 제가 할게요."


극구 사양하는 그 태도가 과하게 예의 발랐다. 아니, 어딘가 두려워 보였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사장의 직원이라서 그랬던 것 아닐까. 고작 엔진오일이나 갈러 온 나 같은 놈조차, 그녀에게는 이사장의 눈과 귀로 보였을 테니까. 행여나 내가 돕는데 본인은 가만히 있는 걸 이사장이 알면 건방지다고 할까 봐, 혹은 내게 빚을 졌다가 흠이라도 잡힐까 봐. 그녀는 나에게조차 '을'이 되어 벌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냥 숟가락을 놓고 그릇을 내려드렸다. 별일도 아닌데. 다시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데, 여자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쾌감 혹은 자괴감. 안주를 들고나가는 그녀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내가 뭘 실수했나, 집에 와서도 한참을 곱씹었다.


며칠 후, 이사장실에 들어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두꺼운 하드커버 책을 봤다. 박사 학위 논문이었다. 저자 이름은 그날 그 여자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술자리 심사'가 이런 거였구나. 그녀는 그날 자신의 논문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인'이라는 모욕적인 농담을 견디며 안주를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


무심코 논문을 펼쳤다. '쩍' 하고, 접착제가 뜯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새 책이었다.


그 쩍 갈라지는 소리가 답을 말해줬다.


수년간의 연구보다 술상 위의 안주가 더 중요한 현실. 그 더러운 판에서 버티고 있는 자신 앞에, 눈치 없이 해맑게 선의를 베푸는 내가 얼마나 거북했을까. 심지어 이사장의 직원인 나에게조차 쩔쩔매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을까.


내가 베푼 친절이 그녀에게는 자신의 초라함을 확인사살하는 총알이었던 거다. 그러니 도망칠 수밖에.


논문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탁자에 가구처럼 놓여있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두께만큼의 자존심을 갉아먹고 얻어낸 결과물일 뿐.


아마 그녀는 박사가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박사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겠지. 지금 느꼈던 이 환멸은 희석되고, 언젠가는 그녀도 누군가에게 의전을 받고 술시중을 받는 것에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그녀의 앞날은 모르겠다. 다만, 그날 식당을 도망치며 느꼈을 그 뜨거운 환멸만큼은, 제발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기억마저 없다면, 그 두꺼운 논문은 정말로 라면 받침보다 못한 종이 뭉치에 불과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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