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이든, 동상이든 아픈건 마찬가지다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서의 시간은 내 이력서에서 꽤 비중 있는 경력이지만, 동시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도 하다.
자세히 뜯어보면 기가 막힌다. 나는 이 바닥에서 활동가, 근로지원인, 활동지원사라는 세 가지 역할을 모두 거쳤다. 남들은 하나 하기도 힘들다는 직함들을 종류별로 다 찍어 먹어 본 셈이다.
도망친다고 도망쳤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IL센터라는 바닥에 아주 깊숙하게, 발목까지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밑바닥 실무부터 다 굴러봤기에, 그곳의 민낯도 더 적나라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소위 말하는 운동권 성향이 강한 곳이었다. 벽에는 투쟁 구호가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회의 시간에는 인권과 정의, 연대 같은 거창한 단어들이 둥둥 떠다녔다.
처음에는 그 뜨거움이 멋져 보였다. 하지만 그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이 외치는 대의가 장애인 당사자들을, 그리고 실무자들을 어떻게 도구로 쓰는지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장애인을 위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철저히 이용했다. 장애인 공공일자리라는 생계 수단을 미끼로 던져놓고, 그들을 시위 현장으로 내몰았다. 일자리를 유지하려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가야 했다. 그들은 휠체어 탄 장애인들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무기이자 방패로 앞세웠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들의 이중성이었다. 정부 지원금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정작 그 돈으로 모인 사람들을 데리고 정부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활동이라는 그럴싸한 명목하에, 약자들의 절박함을 볼모로 잡는 그 행태가 나는 역겨웠다.
결국 나는 그곳을 나왔다.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했던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 나는 평일에 장애인 근로지원인으로, 주말에는 활동지원사로 일했다.
거창한 사명감 따위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근로지원인은 오직 돈을 편하게 벌기 위해서 선택했다. 머리 안 쓰고 휠체어 밀어주고 시키는 거나 도와주는 것만큼 속 편한 일은 없었으니까. 차라리 그게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보다 나았다.
주말에는 자립생활주택에서 활동지원사를 하며 그들의 집을 청소하고 밥을 챙겼다. 그곳에서 나는 탈시설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방치되고 있는 장애인들을 목격했다. 시설이 완벽한 건 아니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건 자립이 아니라 유기였다.
그들은 자유를 얻은 게 아니라, 보호막 없이 세상에 던져져 방치되고 있었다.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데, 사람만 덩그러니 내놓은 꼴이었다. (물론 장애인들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활동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나도 너무나 잘 알고있다. 하지만 뭐든 급하면 체하는것 아닌가.)
운동권은 그들을 투쟁의 도구로 썼고, 제도는 그들을 자립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내 밥벌이를 위해 묵묵히 휠체어를 밀고 청소기를 돌렸다.
그러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지만, 사실 구직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가진 경력이라곤 사회복지사 경력밖에 없었고 업직종 전환도 쉽지 않았으니깐.
나는 결국 다시 장애인 쪽 일자리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곳이 장애인쪽 연구원이었다. 이름부터가 풍기는 냄새가 달랐다. 전 직장이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가는 진보의 최전선이었다면, 이곳은 정장을 입고 호텔에서 세미나를 여는 보수의 본산이었다.
솔직히 기대했다. 적어도 이곳은 합리적일 거라고. 그 지긋지긋한 동지 타령 대신, 깔끔한 계약 관계가 있을 거라고. 시스템과 체계가 잡혀 있는 곳에서, 젠틀하게 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도망친곳에 낙원은 없다.
너무 뜨거워서 도망쳤더니, 이번엔 얼음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의 공기는 달랐다. 뜨거운 열정 대신 차가운 의전이 지배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장애인의 자립이나 직업 안정이 아니었다. 이사장님과 임원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 행사에 오신 내빈들의 의전을 실수 없이 해내는 것. 그것이 지상 과제였다.
전 직장이 장애인을 투쟁의 도구로 썼다면, 이곳은 장애인을 행사의 꽃으로 썼다. 화려한 호텔 연회장, 비싼 코스 요리가 나오는 행사. 높으신 분들이 축사를 하고 사진을 찍을 때, 장애인들은 그들의 자애로움을 빛내주기 위한 배경 화면으로 소비되었다. 그 우아하고 세련된 착취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의 역할도 바뀌었다. 투쟁을 위한 편안 옷 대신 정장을 입었지만, 하는 일은 비서에 가까웠다. 이사장의 차 문을 열어주고, 식당을 예약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리 눌러놓는 일. 연구원이라는 직함이 부끄러울 만큼, 내 업무의 8할은 윗분들의 수발을 드는 것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운짱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난 사실 이말 뜻을 알지 못했다. 예전에 영화에서 언뜻 들었던것 같긴 했는데, 그게 운전기사를 비하하는 말이었다. 더 슬픈건 난 정말 운짱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연구원이란 직함이 달린, 점자가 찍힌 명함을 열심히 들이밀었다. 그래도 혹시 여기에 다른 길이 있을지 모른다고, 이게 혹시 여기서 살아남는 방법이라면 말이다. 앞에서 내 명함을 받고는 나중에 그 사람이 내린 자리를 확인해보니 뒷자리에서 손장난처럼 벅벅찢어서 차 손잡이 안에 내 명함을 꾸겨넣은 사람이 있었다.
이사람들에게 나란 사람은 그저 무생물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게 완전자율주행이구나.
진보 진영에서는 "대의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라"고 강요했다면, 보수 진영에서는 "질서를 위해 아랫사람이 복종하라"고 요구했다. 전자가 거칠게 사람을 몰아붙였다면, 후자는 예의 바르고 교묘하게 사람을 짓눌렀다.
진보는 위선적이었고, 보수는 권위적이었다. 장애인은 양쪽 모두에서 훌륭한 밥벌이 수단이자 명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양극단을 오가며 밥을 빌어먹는 박쥐 같은 존재였다.
그 연구원을 나오던 날, 나는 정장을 벗어 던지며 생각했다. 왜 내 인생에는 중간이 없을까. 뜨거워서 데이거나, 차가워서 얼어 죽거나. 내 인생에 봄은 없구나.
덕분에 인사담당자들이 보면 바로 파쇄기로 달려가는 나의 이력서의 한부분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