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재의 민낯

김치찌개는 어디에든 있다.

by 야호너구리

내 이력서 경력란의 가장 상단에는 '해외 전시회 운영 및 조율'이라는 꽤 그럴싸한 한 줄이 적혀 있다. 유럽과 중동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규모의 전시회를 다녀왔다는 기록은, 나를 마치 영어도 유창하고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글로벌 인재'처럼 보이게 만든다.


사실 출장이 결정되었을 때, 나도 잠시 착각에 빠졌다. 20대 때 배낭여행으로 영국을 다녀온 이후 근 10년 만의 유럽행이었다. 나 출세했네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빳빳하게 다림질한 셔츠를 입고, 외국 바이어들과 유창하게 영어를 하며 비즈니스를 하는,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현장의 실상은 코미디, 아니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


전시장은 거대했고, 전 세계에서 온 엘리트들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유창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짧은 영어는 된다. 하지만 그건 대화가 아니었다. 그저 한국에서 달달 외워간 구문들을 상황에 맞춰 기계적으로 뱉어내는 것에 불과했다.


아임 오거나이저 코리안 퍼블릭 헬로 땡큐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언어가 아니라, 입력된 값을 출력하는 낡은 자판기의 기계음 같았다. 영어로 적을 가치도 없을 만큼 한국적인 발음과 내용이었다.


그마저도 예상 질문을 벗어나면 나는 고장 난 기계처럼 멈춰 섰다. 외국 바이어가 무언가 더 물어보면, 나는 당황하며 폰을 내밀었다. 결국 스마트폰을 들고 번역기를 돌렸다


번역기가 돌아가는 그 1, 2초의 정적. 바이어의 의아한 눈빛과 나의 비굴한 미소가 교차하는 그 짧은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나는 소통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거치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큰맘 먹고 유럽까지 왔으면 그 나라 문화를 경험해 보는 게 당연할 텐데, 윗분들의 취향은 지독하게도 보수적이었다. 우리는 독일에서도, 두바이에서도 기어이 한식당을 찾아냈다.


현지 물가보다 두 배는 비싼 돈을 주고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을 시켜 먹었다. 창밖으로는 라인강이 흐르고 부르즈 칼리파가 반짝이는데, 우리 식탁 위에는 서울 여의도 어느 지하 식당과 다를 바 없는 뻘건 국물과 소주잔이 놓여 있었다. 그 이질적인 풍경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역시 한국 사람은 밥심이지. 얼큰한 걸 먹어야 속이 풀려라는 상사의 그 말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를 털어 넣었다. 웃기면서도 서글펐다. 몸은 지구 반대편에 와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한국이라는 좁은 우물 안에 갇혀 있었다. 이건 출장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와서 하는 회식일 뿐이었다.


호텔 방으로 돌아오면 씻을 힘도 없이 침대에 쓰러졌다. 화려한 도시의 야경이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지만, 커튼을 쳐버렸다. 외국 마트는 어찌나 일찍 문을 닫던지, 혼자서 맥주를 사러 갈 곳도, 마실 곳도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편의점에서 4캔 만 원짜리 맥주라도 사 들고 왔을 텐데.


낮에는 못하는 영어로 어떻게든 해볼려고 발악하고, 밤에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한국 직장인으로 사느라 내 영혼은 이미 방전된 상태였다. 침대 시트의 서늘한 감촉과 이질감이 느껴지는 방냄새만이 여기가 낯선 곳이라는 걸 알려줄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화려한 해외 출장 기간 중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현지가 아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 그 좁아터진 이코노미 좌석이었다.


무릎이 앞 좌석에 닿을 만큼 좁고 불편한 공간. 하지만 그곳은 상사의 눈치를 볼 필요도, 말 안 통하는 바이어에게 어떻게든 해볼려고 하려고 했더 나에게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기내식과 싸구려 와인을 와구와구 털어 넣고, 작은 모니터로 영화를 보며 멍하니 있을 수 있는 시간. 몸은 구겨져 불편했지만, 마음만은 비로소 자유로웠다.


11시간의 비행, 3번의 기내식 2편의 영화를 보고 나는 한국에 도착해, 나는 다시 이력서를 고쳐 썼다. '글로벌 마인드와 현장 대응 능력을 갖춘 인재.'


그 씁쓸하고 아까웠던 시간들을,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그 도피의 해방감을 '역량'이라는 단어로 뻔뻔하게 포장하면서. 이런 포장이라도 안하면 더더욱 초라해질것으로 알았기에,


내가 가진 건 글로벌 감각이 아니라, 외워간 문장을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뻔뻔함과, 지구 반대편에서도 묵묵히 김치찌개를 먹으며 버틸 수 있는 맷집뿐이다. 그걸 능력이라고 불러준다면야, 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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