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기술서

생존일지

by 야호너구리

이력서에서 가장 쓰기 힘든 칸은 '경력 기술서'다. 빈칸을 채우기 위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면, 손끝이 미세하게 저린다. 내가 적어야 할 것은 나의 역사인데, 나는 자꾸만 소설을 창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화면 속에는 총 7년 차 실무 전문가 라는 묵직한 타이틀이 적어놨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 7년은 한 우물을 깊게 판 장인의 시간이 아니라, 어디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며 얕은 물가에서 발만 담갔다 뺀 시간들의 합계라는 것을. 8번의 이직,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년 남짓. 내 경력은 누더기처럼 기워져 있다.


국제 전시회 운영 및 조율이라고는 적으면서 헛웃음이 난다. 남들이 보면 3개 국어쯤 하며 바이어와 협상하는 엘리트를 상상하겠지만, 실상은 말 안 통하는 타지에서 터지는 사고들을 몸으로 때우던 시간들이었다. 손짓발짓 모두를 동원해서, 조율이 아니라, 네덜란드 소년처럼 벽을 내몸으로 막은것 뿐이다. 뭐 네덜란드 소년이야. 마을을 지킨다는 숭고한 뜻이라도 있었지, 기냥 나는 파닥거림이었다.


대표 의전 및 수행 고상한 단어다. 하지만 껍데기를 벗기면 남는 건 운전기사다. 밥시간 맞춰 식당 예약하고, 차 문 열어주고, 차 안에서 하염없이 대기하던 시간들. 거기엔 전문성이 아니라 눈치와 비위가 필요했을 뿐이다.


팀 리딩 및 프로젝트 총괄, 내가 리더십이 있어서 팀장이 된 게 아니다. 열악한 처우를 못 견딘 사람들이 줄줄이 도망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것이었다. (심지어 직급도 올려주지 않았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다. 물이 새면 테이프를 바르고, 기둥이 흔들리면 어깨로 받치며 버텨왔다 나의 경력은 화려한 커리어가 아니라, 살기 위한 생존의 흔적들이다.


면접관은 묻는다. "다양한 경험을 하셨네요. 도전적인 성격이신가 봐요?" 나는 "네, 새로운 환경을 즐깁니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삼킨다. "아뇨, 갈 곳이 없어서 아무 데나 굴러먹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열심히 포장했지만 결국 누더기가 된 나의 경력 기술서를 보며 생각한다. 이 종이 쪼가리 어디에도 진짜 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살아가기위해 흘렸던 식은땀과 눈물만큼은 진짜였다고.


한 분야의 전문가는 못 되었어도, 별 능력없이 7년을 버텨온 나 자신이 가끔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연민이 든다.


엔터키를 누른다. 줄이 바뀐다. 또 하나의 거짓말, 아니 또 하나의 생존 기록이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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