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후 포부

지옥과 좀 더 편한 지옥 사이에서

by 야호너구리

이력서의 마지막 관문, '지원 동기 및 입사 후 포부'란이 남았다. 가장 쓰기 싫고, 가장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는 칸이다.


커서는 깜빡이고, 나는 습관처럼 '비전'이니 '성장'이니 하는 단어들을 조합하려다 멈칫한다. 20대 때는 그런 가짜 포부를 쓰면서 비참했다. 꿈도 없고 열정도 없는 내가 껍데기 같아서. 하지만 36살, 8번의 이직을 거친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싶을 뿐이다. 조금 더 벌고, 조금 더 편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거창한 비전? 그런 건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잠시 뒷주머니에 구겨 넣었고,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생존이다. 잘리지 않고 월급이 밀리지 않는 직장을 찾아, 가늘고 길게 버티는 게 내 유일한 포부다.


꿈이 없는 게 뭐 대수인가. 세상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꿈 없이 살다가 그렇게 사라진다. 그게 뭐 그리 큰일이란 말인가. 그 안에서 매일매일 전쟁 같은 지하철을 뚫고, 남들의 무시와 멸시, 눈치를 견디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 그게 진짜 삶이다.


한때는 나도 장밋빛 인생을 꿈꾼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은 없다. 나는 화려한 꽃을 피우지도, 진한 향기를 내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넌 가능성이 있는데 왜 그러고 사냐"고 다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놈의 가능성이 나를 얼마나 망쳤는지. 툭툭 내뱉은 희망 고문을 너무나 충실하게 믿고 기다렸던 내가, 지금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그래서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걸 포기했다. 대신 나는 질긴 생존자로 살아가기로 했다. 또다시 전송 버튼을 누른다. 이 이력서가 또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지옥일지, 아니면 좀 더 편한 지옥일지. 천국 따윈 없다는 걸 아니까 기대도 안 한다.


하지만 뭐, 이제는 상관없다. 어디든 가서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생존하고, 내 방식대로 버텨낼 테니까.


그리고 만약 못 버티면 어떠냐. 또 도망가면 되지. 한 번 도망친 거 두 번은 못 하겠냐. 괴로워 죽을 것만 같으면 도망치는 게 낫다. 우울증 환자로서, 그리고 8번 도망쳐본 사람으로서 확신할 수 있다.


도망쳐서라도 살아남는 것. 이 세상에 두 발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애쓴 게 인생이니까. 그러니 괜찮다. 또 도망쳐도, 또다시 시작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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