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

by 야호너구리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엄마를 만났다. 정리라는 말이 웃기다. 정리될 거라 생각한 쪽이 나였으니까.


나는 준비해둔 문장을 꺼냈다.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어.” 생각보다 담담하게 말했는데, 돌아오는 말은 담담하지 않았다.


좋은 말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 아니, 최소한 선은 지켜줄 거라 믿었다. 보통은 예상보다 조금 더 상처를 받는다. 이번에는 그보다 더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철이 없는지, 아내가 나를 어떻게 바꿔놨는지, 부모 마음을 모르는 인간이 무슨 가정을 꾸리냐는 말까지 들었다. 자존감이라는 게 실제로 깎이는 소리가 난다면 아마 연필을 칼로 다듬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할 것이다. 사각, 사각. 얇아지는 쪽은 늘 나였다.


와이프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부터는 나는 거의 계산을 멈췄다. 선이 어디인지, 어디까지가 의견이고 어디부터가 폭언인지 구분하는 작업이 무의미해졌다.


집에 오니 와이프가 말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고, 내용을 듣기전에 이미 사과부터 했다. 그런 말을 듣게 해서 미안하다고. 우리가 같이 내린 선택인데, 화살은 한쪽으로만 날아갔다. 그 방향을 막지 못한 게 내 몫처럼 느껴졌다.

조금 뒤, 나에게도 문자가 왔다.


아빠 화 많이 났다
앞으로 보지 말고 살아라
좋은 장모하고 니와이프랑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
손주도 소용없다
인간덕이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


문장은 짧았고 띄어쓰기는 들쭉날쭉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또렷했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갑 자기 조건부 계약처럼 느껴졌다. 출산이라는 조항에 체크하지 않으면 자동 해지되는 관계. 애를 안 낳겠다고 선택한 것치곤 대가가 과한 건 아닌지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 곧 멈췄다. 선택에는 늘 비용이 붙는다. 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뿐이다.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고 그 사실 하나로 아들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 정리가 끝난지는 잘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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