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제차를 긁다, 딸의 팔이 탈골되다.
우리 시엄마 한교 씨는 습관적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한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특히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한다.
엊그제 온 가족이 기분 좋게 장어 외식하러 나가는 길이었다. 아부지 차가 주차장에서 나가려다가 외제차를 긁었다. 덜덜덜. 온 가족이 벌벌벌. 당황스럽고 짜증스럽기도 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싶기도 하고.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졌다가 모두의 마음이 고장 나려던 찰나. 한교 씨가 조용한 목소리로 감사, 감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감사, 감사. 사람이 다친 사고가 아니라서 감사. 우리에게 이렇게, 겸손하게 살라고 경각심을 주셔서 감사. 우리 차라도 심하게 손상되지 않아서 감사.
불평 나라에 파송된 평안 나라 외교관처럼, 뭔가 꼬인 상황에서 엄마가 읊조리듯 내뱉은 감사의 선포에는 굳은 마음을 푸는 권위와 힘이 있었다. 한교 씨의 감사, 감사,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굳어있던 내 마음을, 갈팡질팡 갈 바를 모르던 온 가족의 마음을 토닥여 진정시켰다.
보험회사, 상대 차주와의 통화는 신랑이 맡았다. 신랑은 이런 일을 부드럽고 매끄럽게 처리한다. 멋지다. 아버지는 당신이 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나 스트레스받고 큰 고민이었을 텐데 아들이 그런 일을 대신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상대 차를 고치는 데 꽤 큰 비용이 드나 보다. 한교 씨는 또다시, '그 정도에서 그쳐서 감사'라고 선포했다.
며칠 뒤.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단양에 갔다가 올라온 하연이가 현관에 들어서는데 낯빛이 안 좋았다. 점퍼 소매에 오른팔은 제대로 들어있는데, 왼팔은 직각으로 접은 채 몸통 부분에 웅크리고 들어 있었다. 울먹이는 표정이 만 이틀 만에 엄마를 봐서 그런가 싶었는데 왼쪽 팔이 아프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움직이지를 못한다. 진료를 요하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엄마로서의 직감.
단양에서 출발하기 전에 옷을 입히는데 요 장난꾸러기가 드러눕고 팔을 빼고 도망가고. 어떻게 했을지 눈에 선하다. 추우니까 내복 위에 겉옷 하나라도 입혀 가야 하기에 드러누운 손녀딸의 팔을 잡아 일으키다가 인대가 늘어났거나 탈골이 된 듯하다고 했다.
저녁 7시. 나는 막 갔다 오려던 6만 원짜리 필라테스 개인 수업을 날리고, 하연이를 품에 안고 동네에 딱 하나 저녁에도 아직 진료 중인 정형외과로 향했다. 마침 퇴근한 신랑의 차를 타고.
딸이 아프다는 말에 다급하고 긴장한 신랑의 마음이 운전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왼쪽에서 직진 차량이 오고 있는데 안 보이는지 계주선수 코너 돌듯 바쁘게 우회전을 해버리는 남편. 큰 사고가 날뻔했다. 상대 운전자와 남편이 창문 너머로 서로 언성을 높인다. 나는 심장이 벌렁거린다. 하연이가 다친 것도 속상한데, 걱정되는 마음을 어찌할 바 몰라 거칠게 차를 모는 남편의 태도가 싫다. 아픈 딸이 듣는데도 계속해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나도 한 됫박 짜증을 뿌려버리고 싶다.
그 순간,
마법처럼
한교 씨 생각이 난다.
마음속에 한교 씨의 잔잔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감사, 감사. 감사, 감사.
목숨이 오가는 극단적 위험 상황이 아니라 팔이 아픈 거여서 감사.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하연이가 불안할 텐데 딱 그 타이밍에 엄마인 내가 같이 있어줄 수 있어서 감사. 신랑이 때마침 퇴근하여 같이 차 타고 병원 갈 수 있어서 감사. 저녁 7시가 넘어 동네 정형외과가 온통 문을 닫았는데 7시 30분까지 진료 보는 병원이 한 군데 있어서 감사.
짜증을 뿌리고 싶던 마음이 잠잠해졌다.
그렇게 방문한 병원. 네이버 리뷰를 보니 (1) 간호사분들이 나이가 많아요. 의사가 불친절해요.라는 부정적 리뷰와 (2) 다른 데서 못 고치던 거 원장님이 봐주셔서 나았어요.라는 긍정적 리뷰가 공존했다. 1번과 2번 리뷰 사이에서 뭐가 더 진실일까, 가도 되는 병원일까 고민하던 차에 또다시 한교 씨 목소리가 마음에 울린다. '진료받을 수 있음에 감사!' 잠잠해진 마음으로 병원에 들어섰다.
과연 간호사 선생님들은 나이가 많으셨고 의사 선생님도 친절로 무장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엑스레이실로 일단 들어오라는 지시(?)에 나는 의아했다. 진료도 안 해보고? 하연이는 그칠 줄 모르고 큰 소리로 울면서 내 품에서 1mm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의사 선생님은 하연이 팔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엑스레이를 찍었다.
알고 보니 의사 선생님은 엄청난 베테랑. 5초 정도
하연이의 팔을 만지고 돌렸는데, 진단하려고 만진 게 아니라 그 찰나에 어긋난 뼈를 맞춘 거였다. 엑스레이는 뼈가 제대로 맞춰졌는지 확인하려고 찍은 것. 상반된 감정으로 쓰인 1번과 2번 리뷰는 하나의 진실을 이루고 있었다. 가히 친절하진 않지만, 매우 노련한 베테랑 의사 선생님. 딱 한 군데 갈 수 있었던 병원에서, 마치 예비하신 것처럼 실력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감사했다.
외제차를 긁고 보험료가 오른 상황에서 엄마가 선포한 감사는, 딸의 왼팔이 탈골된 상황에서 내가 선포하는 감사로 이어졌다.
불행한 사건은 불안한 마음을 빚어내 영혼과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불평과 손가락질이 오고가게, 비난하고 원망하는 분위기가 생기게. 그것이 불행의 나쁜 속셈이다.
그러나 한교 씨, 그녀가 잔잔히 읊조리는 감사에는 불행의 이러한 횡포를 차단하고 불안의 역사를 무력하게 만드는 강한 힘이 있다.
나는 그 힘을 부지런히 물려받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