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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달 솔방울 Dec 19. 2023

 식기세척기의 의외의 쓰임새


  우리 집 식기 세척기는 이름이 '이모님'이었다가 몇 달 전쯤 '쓱싹이'로 바뀌었다. 인덕션 보글이, 큐커 지글이, 세탁기 돌돌이, 건조기 뽀송이와 어울리게  식세기도 귀여운 이름으로 바꿔주고 싶다는 신랑의 의견에 따라서다.

  남편의 스마트폰에는 스마트홈 어쩌고 앱이 깔려 있다. 보글이, 지글이, 돌돌이, 뽀송이, 쓱싹이는 일을 할 때마다 거기에다 띵동 띵동 보고를 한다. 신랑은 회사에서 토토토토 자판을 두들기며 일을 하다가도 띵똥띵똥 가정 사원들의 집안일 보고를 받는다. 실무가 편한 나로서는 질색인 '관리자' 역할이 남편한텐 제격인가 보다.

  아무튼.

  돌돌, 지글, 보글이는 입사 이후 지금까지 잘 지낸다. 그런데 우리 집에 야심 차게 입사하였으나 요즘 나에게 퍽 섭섭한 평가를 받고 있는 두 사원이 있으니 그건 바로 쓱싹이(식기 세척기)와 뽀송이(건조기)다. 뽀송이 이야기는 다음번에...

  식기 세척기 쓱싹이는 설거지를 대신해주어 나에게 편리를 선사하겠다는 달콤한 포부로 합격을 따냈지만, 만 2년 간 쓱싹이와 동업해 본 결과 그는 뜻하지 않게 여러모로 불편을 초래한다.

  쓱싹이의 업무 이행 조건은 나로서는 경이롭도록 까다롭다. 식기나 그릇이 서로 함부로 포개어지는 면이 없도록 정렬을 제대로 맞춰 일감을 대령해야지만 그는 설거지라는 값을 이행한다.

  쓱싹이는 또한 애벌 설거지를 해서 대령한 그릇 깔끔하게 씻어낸다.

애벌 설거지가 꼭 애벌 '세탁' 같아서 신랑은 언제부터인지 그릇 '닦은거야'가 아니라 그릇 '빨았어? '라고 물어본다. 신랑의 세탁 드립에 웃던 나도 언제부터인지, '응 그거 빨래 한 그릇들이야!'하고 답하곤 한다.

  애벌 헹굼 없이 눌어붙은 반찬이나 밥풀 묻은 그릇을 그냥 입력하면, 쓱싹이는 밥풀과 반찬의 흔적을 제법 남긴 그릇을 출력한다. '스팀세척'기능을 실행하면 밥풀을 떼 줄지도 모르나 쓱싹이에게 스팀 세척 기능을 요구하면 나는 다소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의 작업 속도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다. 상단 급속 모드는 20분으로 신속한 편이다. 그러나 보통 모드에다가 헹굼 추가로 3단 그릇대를 다 돌리려면 일반적으로 1시간 9분이 걸린다. 그 안에 들어간 그릇이나 숟가락이 중간에 필요하게 되어도 적어도 1시간 9분 동안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쓱싹이를 재촉할 순 없다. 숟가락 빨리 내놓으라고 팍 열어버리면 고장난다...


애기 숟가락 꺼내야 되는데 31분이나 남았다니...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쓱싹이에게서 의외의 쓰임새를 발견하였다. 우리 집에서 쓱싹이는 주로 대형 그릇 건조대로 기능한다.

  내가 틈나는 대로 하나씩 빠르게 설거지를 해서 식세기 안에 넣으면, 바깥으로 나와 있는 그릇이 없이 주방이 깔끔하게 정리된다. 그릇에서 떨어지는 물기도 배수구로 빠지니 바닥면 물이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마구 쌓인 식기를 가려주기까지 하니 가림막 기능까지 있는 무려 3단 그릇 건조대인 셈이다.


  본래의 쓰임새와는 다른 기능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무쪼록 의외의 역할을 감당하며 우리 집 쓱싹이는 나름대로 잘 지낸다. (어차피 붙박이로 입주하는 조건으로 입사를 하였으므로 쫓아낼 수도 없긴 하지만.)


열려 있는 날이 더 많은 우리 집 식기세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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