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2일 금요일
오후 1시. 삼천리 도시가스 기사님이 초인종을 눌렀다. 리모델링 후 인덕션을 사용할 거라서 가스를 철거하는 날이다. 나의 긴 긴 긴장감과 대조적으로, 가스관 철거는 너무나 손쉽게, 순식간에 끝났다.
저 아래 분홍색 가스 밸브는 혹시 모를 미래에 대비하여 지퍼백에 담아 공구와 함께 보관했다. 가스레인지가 있지만 불은 더 이상 타오르지 않았다.
주방 공사를 한다는 것이 새삼 실감났다. 잘 해낼 수 있을까? 망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걱정보다는 기대가 더 컸기에, 기사님을 다시 불러 가스관을 연결해달라고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걱정이 더 크다 해도 이제 되돌릴 방법도 없다. 당장 내일이면 주방 가구는 모두 철거된다.
1~2주 전부터, 공사할 동안 머물 숙소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방에 대충 있으면 된다고, 온라인 찾아보면 근처 숙소 금방 구할 수 있다고 쉽게 말하는 신랑의 입엔 얄미움이 가득했다. 에어비앤비, 달방, 북킹닷컴 등 안 들어가 본 사이트가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검색하고 찜하고 고민하고 포기하고, 다시 검색하기를 반복했다.
에어비앤비에 10일에 120만 원짜리 숙소가 떴다. 인기가 많은 호스트의 숙소였는데, 딱 우리 집 공사하는 기간 동안 예약이 가능했다. 40평대 숙소가 정말 깔끔하고 넓고 쾌적해서 부모님이 오셔서 도와주실 때 대가족이 함께 지내기에도 불편함이 없을 듯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도 많았다. 쾌적한 숙소인 만큼 비싸다는 점, 신랑 회사에서 멀다는 점, 무엇보다도 우리 집에서 30분 넘게 걸린다는 점 등이었다. 공사 총책임자인 나는 공사를 할 때 현장에 자주 들락거려야 하는데 30분 넘게 걸리는 곳에 숙소가 있으면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너무 많다. 집과 신랑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면서 너무 비싸지 않은 숙소를 구해야 했다.
손가락 놀리며 이리저리 열심히 조사해봤는데 뾰족한 수가 나지 않는다. 답답할 땐 일단 밖으로 나가 발품을 팔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어차피 전기 집에도 한 번 들러야 하니 일단 나가보자. 나는 허리에 장착한 힙시트에 돌쟁이 딸을 앉힌 채, 차 키를 챙겨서 주차장으로 갔다. 전기집까지는 차로 5분 이내 거리다.
전기 매장에 들러 주방 조명을 고르기로 한 날이기도 하다. 매장에 여러 종류의 레일 조명이 있었는데,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은 없었다. 그래도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서 사진 찍어두고 월요일까지 확정해서 말씀드리기로 했다.
전기 집에서 나오는데 문득 옆 옆 건물에 있는 부동산이 눈에 들어왔다. 이 근처에는 2~3개의 부동산이 있다. 순간적으로 들어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짜고짜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근처에 1~2주 정도 머무를 원룸이나 투룸 숙소가 있을까요?”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는 무안할 정도로 단칼에 질문을 잘랐다.
"아뇨. 요새 전세/월세도 없는데 단기 숙소는 더 없죠.”
그렇다. 집값이 올랐다. 그것도 엄청 올랐다. 일시적인 거품일 수는 있지만, 어쨌거나 그 때문에 아직 값이 오르기 전에 전세나 월세가 다 나가버린 통에 전세, 월세 구하기도 어려운 요즘이다.
나는 길거리에 엉거주춤 서서 왼손으로 힙시트에 앉은 딸의 허리춤을 잡고,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바빠졌다.
나는 맘 카페에 들어가 ‘단기 숙소’를 검색하고, 포털 사이트에서 ‘단기 임대’를 입력하고, 북킹닷컴과 달방에 들락날락했다. 영양가 없는 같은 정보만 계속 뜨니, 내 마음은 시시각각 불안해졌다. 나는 아기한테 우리가 처한 상황을 쫑알쫑알 이야기하면서 다음 부동산을 향해 걸어갔다. 오래 차고 있던 힙시트와 그 위에 앉은 아기가 무거워 배가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영락없는 아줌마 걸음이다.
다음 목적지는 건물 모서리에 자리 잡은 좀 특이한 구조의 부동산이었다. 내부는 다소 썰렁했고 나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마음은 아까보다 더 간절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1~2주 정도 머무를 원룸이나 투룸 숙소가 있을까요?”
"누가 있을 건데요?”
"저와 아기, 신랑이랑요. 가끔 부모님이 도와주러 오실 수도 있긴 한데 주로 저희 세 식구가 공사할 동안 지낼 거예요.”
부동산 주인은 내 절박함으로부터 돈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사모님’한테 전화를 했다. 5분 뒤 아기를 안은 나는 부동산 사람의 ‘사모님’이 내놓은 집을 보러 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한 빌라의 꼭대기 층, 주인집 옆에 있는 방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는 나한테 아줌마는 그냥 들어가도 된다고 그랬다.
"애기 엄마 들어오기 전에 집주인이 입주 청소 다시 할 거예요.”
다락이 있는 3~4평 남짓한 방이었는데, 눈으로 훑어보는데도 바닥의 끈적거림이 느껴졌다. 구석구석 거미줄이 있을 것 같은 찝찝한 첫인상으로, 사람이 난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한 달 빌리는 방세는 50만 원. 아줌마한테 낼 복비는 10만 원이었다. 남루한 행색 치고 비싼 값이었으나, 나는 급한 마음에 단기로 임대할 방이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랑과 협의해봐야 한다고 말하고 숙소 사진 4~5장을 찍어 남편에게 보낸 뒤 부동산 사람과 헤어졌다. 그녀는 빨리 얘기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랑 계약할 수도 있다는 말로 나의 조급함을 충돌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무척 피곤했다. 엄마와 산책을 다녀와 기분이 좋아진 딸은 달디 단 낮잠에 빠졌다. 나도 그 옆에 누워 자고 싶었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나는 정신력을 끌어모아 공사 안내문, 공사 양해문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