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3일 금요일
밤 9시. 10개월 딸이 잠들었다. 나와 신랑은 각자 볼일을 마친 뒤 9시 반쯤 주방에서 접선했다. 새 스케치북에 그림 그릴 생각에 들뜬 아이들처럼, 우리는 아이패드 굿노트를 켜고 꿈꾸는 주방을 그리려고 했다. 하지만 인테리어나 디자인 쪽으로 경험이 전무한 터라 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별로 막막하지 않은지 태평스레 웹툰을 보는 신랑한테 야속하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그는 느긋하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셀인 카페와 오늘의 집에 드나들었다. 두 눈이 한껏 퀭해지고 똥줄 타는 마음이 극도로 치달을 때쯤, 마침내 두 줄기 빛을 발견했다. 구조도와 무드 보드!
'주방 리모델링' 이라는 다소 막연한 그림을 그릴 때 씨실과 날실처럼 구체성을 부여해주는 도구 두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구조도와 무드보드다.
구조도는 하드웨어다. 개수대, 쿡탑, 냉장고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배치하며 여러 장(아마도 수십 장)의 구조도를 그리다 보면, 사용할 사람이 원하는 최적의 구조를 찾는데 도움이 된다. 셀프나 반셀프로 리모델링을 진행한다면 더더욱 꼭 필요한 과정이다.
줄자와 필기도구를 들고 직접 길이를 측정하면서 그려야 한다. 아파트 공식 도면에 나온 치수와 우리 집 곳곳의 실제 치수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실측은 필수다. 냉장고 크기, 개수대 크기, 쿡탑 크기, 상 하부 장 높이와 너비 등을 정확하게 측정해 반영할수록 구조도의 실현 가능성을 판단하기가 쉽다.
주방의 전체 사이즈를 줄자로 측정한 뒤, 모눈종이 한 칸을 20cm로 정하고 그린 첫 구조도다. 다소 무모한 배치이지만,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대면형' 주방임을 깨달았다. 개수대든 쿡탑이든 요리하는 사람과 식사하는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구조도를 그릴 때 참고하면 좋은 키워드가 있다. 주방 워크 트라이앵글이다. 2018년 7월 3일 자로 [꿈꾸는 말락 부부] 블로그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있다.
리모델링 전 우리 집 주방은 이 세 가지가 한 줄로 쪼르르 놓인 일자형 구조다. 가스레인지에서 재료를 볶다가 냉장고에서 굴소스를 꺼내오려면, 편도로만 3미터는 족히 넘는 길을 다녀와야 한다. 필요한 걸 한 번에 꼼꼼히 꺼내놓고 요리할 정도로 찬찬하지 않은 우리는 반찬 하나를 만들면서도 주방에 긴 긴 동선을 그리며 휘적대곤 했다.
인스타그램 청년 진구 페이지에서는 다양한 주방 구조의 특징을 정리한 게시물을 찾았다. ㄱ자 주방, 일자형 주방, ㄷ자 주방, 아일랜드 주방의 장단을 진지하게 살핀 뒤 우리 집 주방에 맞는 구조를 찾는데 참고했다.
1자형 주방은 너비가 좁고 깊이도 2~3미터 정도 되는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선택하는 구조인데, 주로 원룸에서 많이 보인다. 공사 전 우리 집 주방이 이 구조이다. 원룸보다는 넓은 면적의 주방인데도 좁은 공간에서 택하는 1자형 구조를 써서 작업 동선이 비효율적이었다.
워크 트라이앵글 이론에 따른 구조의 효율성을 생각하면 ㄷ자 주방이 이상적이지만, 너비 3m 깊이 5m의 우리 집 주방에 구현하면 자칫 답답해 보일 수 있어서 포기했다. 아일랜드형과 ㄱ자형을 적절히 배합한 가구 배치가 우리 집에 좋을 듯싶다.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구조도가 하드웨어라면 무드 보드는 소프트웨어다. 온라인의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주방 이미지를 모은 것이 무드보드다. 주방의 색감, 상판의 재질, 추구하는 분위기 등 전체적인 콘셉트를 결정할 때 큰 도움이 된다.
흰 도화지처럼 깔끔한 주방도 있고, 노랑 초록 주황 등 통통 튀는 색으로 개성을 더한 주방도 있지만, 내 눈에 자꾸 띄는 건 나무색과 흰색이 섞인 따뜻한 색감의 주방들이었다.
가구 배치는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맘에 차지 않고 예쁜 주방 이미지는 모을수록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괜찮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아는 사람의 여정은, 시간은 오래 걸릴지언정 그 걸음에 기운이 깃드는 법이다.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며 퀭한 눈으로, 그러나 빛나는 마음을 품고 잠들었다. 새벽 2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