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아노 앞에
한참 동안 피아노 앞에 앉지 못했다.
“피아노를 쳐야겠다.”던 새해의 선언이 무색해졌다.
피아노를 배우려 했던 의식·무의식적 작용이 여럿이었겠지만, ‘어떤 위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중 가장 절실하고 절박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연주를 듣는다’는 수동적인 행위(이것 역시 어느 정도 능동·적극적이어야 가능한 일이다)보다는 ‘직접 친다’(‘연주’라고 썼다가 급히 수정했다)는 능동적 행위가 좀 더 제대로 된 위안이 되지 않겠나 싶었을 것이다.
살며 힘들고 버겁고 짜증 나고 성질나는 마음과 감정의 상태에서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다 보면 내 몸을 감싸는 선율이 ‘괜찮다, 괜찮다’ 해 줄 것 같았다. 적어도 피아노 앞에 앉은 시간만큼은 짓누르는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을까 상상했다.
상상과 현실의 괴리는 컸다.
머릿속 계산대로라면 최근 몇 주 간이 가장 자주 그리고 오래 피아노 앞에 앉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시간 피아노를 외면하고 말았다.
관자놀이와 눈 주위가 후끈거리고 머리에 열이 가득 차 있었다. 나와 주위를 향한 짜증과 서운함과 서글픔이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 좌절과 절망도 그 위에 포개졌다. 무기력하고 대책이 없어 다시 슬퍼지고 지쳤다.
‘피아노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라는 변명 같은 문장을 가끔 떠올렸다.
출장을 다녀왔고, 주말을 보냈고, 월요일 출근길. 들릴 행사가 있어 평소 잘 이용할 일 없는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 내렸다. 서울시청 방향으로 바쁜 걸음에 계단이 “띵 띵 띵” 소리를 냈다. 피아노 건반 모양을 한 이 계단을 참 오랜만에 밟았다. 가끔은 사소한 사건 앞에서 그 이유와 의미를 따져보기도 한다. ‘피아노 앞에 앉은 지 오래구나’하는 자각과 이 상황이 ‘그럼에도 피아노 앞에 앉아보는 건 어때’라는 제안처럼 다가왔다. 이 피아노계단을 상상하고 현실로 옮긴 이의 기발·천진함이 새삼스럽기도 했다.
이날 거리를 지나다가, 작은 트럭 뒤에 쓰여 있는 ‘피아노 삽니다’라는 글귀도 눈에 들어왔다. 이건 협박인가.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양손 연습을 시작했다.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