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격리하다-1
출근해서 일정을 정리하던 중 문자를 받았다. 딸아이 이름 뒤에 O월 O일 시행한 [코로나19 검사 결과] “양성”입니다. 큰따옴표 사이에 강조된 ‘양성’이라는 단어가 참 낯설었다. 이 두 글자는 뜻하는 바를 지난 2년의 경험으로 알기에 막막해졌다. 그렇게 잠시 멍해졌다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어서 퇴근해야지’
부서장 등에게 보고하고 회사를 나섰다. 휴가 중이던 부장은 이날 오후에 ‘총’을 맞고 출근을 했다. 사무실을 나와 선별검사소로 곧장 걸어가면서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올 게 왔구나. 운 좋게도 지난 2년 잘 피한다 싶더니...’
서울광장 임시선별검사소에서 PCR 검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설 연휴 뒤 지난 이틀 점심을 같이 했던 후배들에게 연락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검사를 한 번씩 해보라고. 오랜만에 만나 즐겁게 먹었는데 그게 아주 미안한 일이 돼버렸다. 코로나 초창기였다면 그 미안함의 정도가 말도 못 하게 컸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 키우는 후배들도 속으로는 놀랐을 테지만 차분(한 척)했고, 곧 검사를 받아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딸아이의 건강을 걱정해 주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격리시설이 아닌 재택치료를 하게 된 아이는 자기 방에 있었다. 순간 화가 나면서도 오죽했으면 하는 양가감정이 일었다. 지난 일요일 딸아이는 친구들을 만난다고 나갔다. 조심하라고 타일렀지만, 나갈 때마다 듣는 그런 하나마나 한 잔소리가 짜증도 났을 것이다. 그간 늘 ‘설마’하고 친구들이랑 어울렸을 테고, 이제껏 어떤 문제도 없었다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21살 청년들이 둘러앉자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면 그게 안전할 리가 없다. 감염병 탓에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이 청춘들이 얼마나 좀이 쑤셨을까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 사회에 문제로 불거지는 모든 일들에서 부모세대는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너 확진되면 아빠 회사 못 간다”는 반복된 협박성 말을 기억했을 딸아이는 확진 문자에 큰 부담이 됐을 것이다. 와이프의 말에 의하면 조금 울었다고 했다. 아이는 자기 방에 격리되었다. 딸을 두고 어디 갈 수가 없는 처지라 함께 재택 격리를 시작했다.
작은 집에서 세 식구는 각자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유지했다. 수건과 물 컵, 치약, 식기 등을 딸이 쓰는 것과 분리했다. 분리하다 보니 우리가 컵을 수저를 수건을 치약을 같이 쓰는, 사소한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나눠 쓰는 사이였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짠해지고 만다.
심각한 증상이 없어(보여)서 딱히 간병이랄 게 없었다. 매 끼니와 간식거리를 챙겨주는 것이 전부였다. 방 문 앞에 음식을 두고 딸을 부르면 아이가 문을 빼꼼 열고 팔을 뻗어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가끔 잔기침 소리가 새 나왔고 그때마다 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있는 게 “괜찮냐”라고 묻는 것뿐이었다.
이날 2만 명대 확진자가 나왔고 그중 하나가 내 아이였다. 곧 10만 명까지 나올 거라는 뉴스가 나왔다. 아득하지만 언젠가 그 끝은 있을 것이고 이 또한 삶이며, 즐길 수는 없어도 견디며 가는 수밖에. 누굴 원망하고 불운을 탓하기엔 너무 많고, 그 와중에 우린 제법 익숙해져가고 있다.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