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있다
높은 음자리 ‘도’와 낮은 음자리 ‘도’가 헷갈린다. 이 ‘도들’이 헷갈리자, 나머지 여덟 손가락 역시 건반 위에서 갈팡질팡이다. 조금(적어도 ‘도’만큼)은 익숙해질 법한데도 이틀, 사흘 만에 피아노 앞에 앉으면 새삼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저게 ‘도’였던가?' 기준이 되는 계이름을 의심하니, ‘레’부터 줄줄이 갸우뚱할 수밖에. 오선지에 줄과 칸을 눈으로 헤아리며 계이름을 파악하곤 한다. 쉬운 취미는 없다.
어릴 적에 피아노를 배워놨더라면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뭐든 효율을 따지는 시대에 나의 한 없는 '더딤(이라 쓰고 게으름이라 읽는다)' 앞에서 ‘옛날’ 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피아노를 배운다는 건 학원비를 댈 부모님의 의지에 달렸기에 지금 이 ‘탓’은 부모님을 향한 원망인 셈이다.
‘그때 OOO 했더라면…’ 세상 가장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살면서 가장 많이 되뇌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해결되지 않는 후회와 부질없는 고민만 떠안기는 몹쓸 가정이다. 삶은 저만치 앞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왜 그랬을까’하고 자꾸 뒤돌아보며 살는 것이지 싶다.
다시 피아노로 돌아와서, 성인용 교재를 만든 이는 아이들보다 더 빨리, 더 쉽게 배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어떤 아이들과 성인들을 기준에 뒀을까. 뒤늦게 악기를 배워보겠다는 성인의 결심과 의지에 큰 점수를 줬으리라.
성인들이 아이들보다 주의력과 집중력 등 학습을 위한 기초능력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면 오판일 가능성이 크다. 성인이자 직장인의 노동과 그로 인한 만성피로를 변수로 끼워 넣지 않았다. 영혼이 반쯤 털려서 귀가하거나, 털린 영혼을 되찾고자 술을 들이켜고 터벅터벅 집으로 들어서는 가엾은 직장인을 고려하지 않았다. 주중의 피로감과 숙취는 주말의 만사 귀차니즘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초심'이란 건 꼭 잃기 위한 것이라는 듯 시작의 굳은 다짐은 흐물흐물해졌다. 1월 1일 새해가 시작되고 한두 달이 지나 설날이라는 음력 1월 1일을 다시 맞는다는 건, 잃은 초심을 돌아보고 기억하게 하는 고도의 장치처럼 느껴진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배운다는 건 시간을 들이는 일이지만 생각만큼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금세 나올 리 없는 결과에 조바심을 치는 스스로에 '쯧쯧쯧' 혀를 차고 있다. 피아노가 내겐 맞지 않는 건가. 괜히 하지도 못할 것 한다고 설레발이었나. 이런 순간이 넘어야 할 '고비'일 테고, 이걸 넘지 못하면 '포기'가 되겠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포기하지 않은 것이리라. 더디더라도 꼭 가보자.
‘가을쯤 한두 곡이라도 연주를 할 수 있을까’하는 설렘으로 시작했던 나의 2021년 프로젝트 아닌가.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