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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Feb 20. 2021

피아노가 있는 풍경

그저 쓸쓸한...

대체로 맥락 없이 눈앞에 놓인 물건이나 사람, 상황에 눈길이 갈 때가 있다. 이 느닷없음을 따져보곤 한다. 아마도 바로 그 순간 나를 둘러싼 공기와 몸의 리듬과 감각 따위가 의식·무의식의 경험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면)이 자주 일어난다는 건 나의 경험치가 다채로워진다는 말일까.  


며칠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기자회견장에 갔다. 국내외 취재진으로 붐볐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단을 받아보자”라고 제안을 하는 회견이었다. 할머니가 회견석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카메라 모니터에 방금 찍힌 사진을 버릇처럼 확인하는데 할머니 뒤에 반짝이는 물건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카메라 플래시가 반사되어 빛을 머금고 있는 물건이었다. 


‘피아노’였다. 


대체로 맥락 없던 것이 이번엔 맥락을 좀 눈치챌만 했다. 피아노라는 악기에 얼마간의 정을 들였기 때문이리라. 기자생활을 하며 숱하게 왔던 프레스센터 행사장인데 이러한 의식적 시선을 둔 것은 처음이다. '경험'은 놀라운 것이다.   

순간의 인상은 뭐랄까, 사뭇 쓸쓸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좁지 않은 행사장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통 행사장처럼 공간의 앞쪽에 비슷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쓰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쓰임이 없어 밀쳐져 있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복잡했던 회견장을 오가다 피아노 사진을 한 컷 찍었다. 귀퉁이가 부서지고 검은 칠이 곳곳에 벗겨진 채 나무의 질감이 드러나 있었다. 이날 발언자들을 위한 물통 몇 개가 올려져 있었다. 이 그랜드 피아노는 관리되지 않는 악기라는 걸 웅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언제부터 놓여 있었을까. 이 공간에서 수 없이 진행됐을 행사에서 누가 어떤 연주를 했고, 누가 청자였을까. 얼마나 연주됐고, 얼마만큼의 인원이 그 소리를 들었을까. 밑도 끝도 없이 덩그렇게 놓인 물건의 생애와 역사를 더듬거렸다.  


한 달 전쯤에는 어느 초등학교 비대면 졸업식장에서 한쪽에 전시품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풍금에 시선이 멎었다. 소싯적 음악시간에 선생님이 몸을 앞뒤고 크게 흔들며 풍금을 치던 모습과 연주되는 동안 삐걱삐걱 페달 소리와 반 친구들의 동요 합창소리가 아련하게 그려지기도 했다. 


외장 메모리에 담긴 음악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수월과 효율 앞에 피아노가 설 자리는 확실히 쪼그라들었다. ‘피아노가 있는 풍경’이 새삼스럽고 낯설어졌다. '이 회견장의 피아노 연주는 더 이상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임도 없고 버려지지도 못한 '진퇴양난' 피아노의 쓸쓸하고 씁쓸한 풍경이 제법 길게 잔상으로 남았다.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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