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생활, 나쁘지만은 않은데?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한국에서는 5분 거리도 바로 차를 끌고 나가는 프로 탄소배출러였다. 만보기에 1000걸음도 안 걸은 날도 꽤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싱가포르에서 뚜벅이로 살고 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고 벤츠도 아닌 아반떼 신차 비용이 무려 1억 원에 가까운 희한한 나라에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의 특성상 공해 방지를 위해 차량 가격 구조가 다음과 같은 5단계 복잡하게 나뉘고 비용도 매우 높게 책정되고 있다.
1단계 : OMV (Open Market Value) : 외국에서 제조된 차량 가격, 싱가포르까지 운임, 항구 통관 비용
2단계 : PARF (Preferential Additional Registration Fee) : 일종의 보증금으로 OMV의 130%를 추가로 포함하여 판매한 후, 자동차 등록 말소 시에 환불하는 제도
3단계 : COE (Certificate of Entitlement) : 교통혼잡 및 공해 방지를 위한 10년 사용 권리증, 일종의 쿼터제로서 공개 입찰로 가격이 정해짐
4단계 : 자동차 판매상 이익금
5단계 : 차량 등록비 및 기타 비용
이렇게 까다로운 단계를 거쳐 나온 싱가포르의 무서운 차량비용은 입싱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터라 놀랍지도 않았다. 하긴 서울만 한 이 도시국가에서 너도나도 차를 사버리면 공해며 주차며 감당이 안될 것이 불 보듯 뻔할 테니.
기본적인 물품만 단출하게 가져온 비자발적 미니멀리스트에게 차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타던 차량을 3배의 가까운 금액을 주고 차마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운전을 좋아해서 1년에 기본 1만, 어딜 가나 운전은 남편을 제치고 내가 할 정도라 처음 몇 달 간은 서울에 두고 온 애마가 아른아른 거리고 질주본능이 자꾸만 살아나 힘들었다. 이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나 싶었지만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
우선 지하철과 버스노선이 한국만큼 정말 잘 발달되어 있다. 보통 1불 내외의 기본금액에 일정 거리를 넘어가면 추가 비용이 붙고, 다른 버스나 지하철로 갈아타면 무료 환승까지 할 수 있어 너무 편리하다.
게다가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는 취식이 금지되어 있어 매우 깔끔하고 에어컨도 빵빵하게 돌아가서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2번만 갈아타면 싱가포르 내 못 가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노선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중교통이 한 번에 갈 수 있는 거리는 모르지만 2번 이상 갈아타야 하거나, 아이들과 이동하는 경우 보통 나는 차량 공유 서비스인 Grab을 마치 내 전용 기사처럼 이용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스타트업에서 시작하여 2016년 'Grab'이라는 타이틀로 통일하여 동남아 시장을 석권한 대단한 기업이다. 별점제를 이용하여 기사의 사진과 차종, 평점이 바로 공개되고 탑승위치와 하차위치만 정확히 찍어주면 예상 거리와 시간, 금액이 나오기 때문에 오락가락하는 동남아 택시 특유의 바가지요금에서 한결 자유로워졌다.
손바닥만 한 싱가포르에서는 동쪽과 서쪽의 끝, 그나마 시내와 멀리 떨어진 센토사의 경우에도 최대(할증 포함) 30불(20불만 넘겨도 싱가포르에서는 아주 먼 거리라고 여겨짐)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는 전혀 부담이 없다.
뿐만 아니라 자차로 운전할 때 발생하는 피로감, 낯선 곳의 위치 파악, 주차문제 등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뚜벅이족인 나로서는 상당히 만족 중이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싱가포르 내에서는 자동차에 대한 미련이 전혀 남아있지 않을 정도다.
요즘은 Gojek이라는 후발업체도 열심히 선전 중인데 Grab과 두 업체 가격비교를 해보고 싼 쪽으로 골라 탈 수 있어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감사할 일이다. 그나저나 한 번씩 운전 본능이 살아나 나도 여기서 그랩 기사나 되어볼까 하는 생각이 아주, 아주 가끔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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