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예쁜,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
한국에서는 안 쓰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사고파는 중고거래인 '캐롯마켓'이 꽤나 성행하고 있는 모양이다.
싱가포르에서도 주로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촌 벼룩시장이나 육아 맘카페, 그리고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카로셀(carousell) 등에서 중고거래가 제법 이루어지고 있다.
나도 이런 곳들에서 구매도 해봤고 무료드림도 받았으며 실제 판매도 몇 번 해봤다. 카로셀은 다양한 제품들이 구비되어 있고 거래 규모도 큰 편이지만 그만큼 업자들도 많고 찾는 제품의 가격이 그렇게 싼 편은 아니라서 가끔씩 보고 주로 한인 채널을 통해 거래를 한다.(싱가포르가 좁은 나라기 때문에 어느 정도 믿음이 형성되어 있는 편)
싱가포르는 희한하게 골프웨어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지도 않고 그마저도 여자용 브랜드는 가뭄에 콩 나듯 한 귀퉁이에 아디다스, 나이키, 풋조이 등만 아주 조금 구비되어있는 정도다.(그것도 사이즈가 없을 때가 대부분!) 그래서 몇 달 전 골프웨어 몇 벌을 한국에서 공수받았다. 그런데 사이즈 실수(군살이 붙었다고 해두자)로 비싼 브랜드의 옷을 택도 안 뗀 옷을 계속 묵혀뒀다. 입기엔 아무래도 불편할 것이고 그렇다고 고가의 옷을 누구에게 그냥 주기도 좀 애매해서 한국 채널에 벼룩으로 올려봤다. 올린 지 한참이 되어 결국 안 팔리나 싶었는데 고맙게도 얼마 전 이 옷을 사겠다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
왓츠앱을 통해 옷에 대한 상태나 사이즈 등을 공유하던 차 그녀가 본인이 요즘 살이 쪄서 맞을까 고민스러워하길래 몸무게를 물어보니 살쪄서, 살쪄서! 50킬로란다. 아이고 그럼 100% 맞을 거예요(이 마른 사람아).
거래하는 날 그녀를 실제로 보니 딱 봐도 야리야리한 체형의 20대 후반에서 많이 봐도 30대 초반으로, 마스크 너머로도 예쁨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옷을 보더니 "아 이 정도면 충분히 맞겠네요." 하면서 모바일 입금을 해주는데 갑자기 내가 진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2022년에 들어서 난 생물학적으로 완전한 40대 중반에 들어섰다. 아직까지도 내 정신은 지금 나이의 동질감보다는 괴리감을 많이 느끼고 있다. 나는 한국인의 뇌리에서 '40대 중년 여성'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아. 줌. 마...... 의 이미지까지는 다행히 아니지만 보통 내 나이보다 3-4살 적게 봐주는 정도로 감사하달까.
20대 시절만 하더라도(라떼는 말이야... 10대의 화장의 영역은 날라리, 즉 비행청소년이나 하던 것이었고, 대학생들도 티 나게 화장하지 않고 수수하게 다니던 게 기본) 나는 화려한 화장은 물론 네일케어가 안되어 있으면 옷을 벗은 것처럼 느껴지고, 젊음을 무기로 정말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과감한 패션의 선두주자였다. 하지만 그 시점도 30대 중반, 육아전쟁 전후로 서서히 꺾이는 듯하다.
나는 사시사철 여름 나라인 베트남에서 5년, 싱가포르에서 3년째 살고 있다 보니 신발은 쪼리 혹은 운동화, 옷은 무조건 편하고 가볍게, 풀메는 특별한 약속이 있을 때만 가끔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게 날씨와 환경 탓인지 나이 탓인지 귀찮음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지만 요즘은 그 모든 치장에서 해방되니 얼마나 자유로운지. 특히 한국보다는 유행이 크게 없고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옷을 입고 다니는 외국이라(물론 한국사람들끼리 만나는 자리는 또 다르지만) 가능했던 것 같다.
중고거래에서 본 그녀를 보고 잠깐 패배감에 맛봤다는 건, 아직도 내가 외형적인 면에 치중하고 있다는 걸까. 아니면 서서히 나이가 들어가는 중년의 여자가 이제 한참 피어나는 시절의 젊은 여자를 보고 느끼는 그런 감정일까. 찜찜하고 뒤숭숭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내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생각도 생각이 필요해'의 저자 존 에이커프는 머릿속에서 맴도는 나쁜 사운트 트랙(생각 과잉), 즉 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잡념, 자격지심은 빨리 긍정적인 사운드 트랙으로 바꾸어 넣으라 했다.
그래 난 그녀가 아직 가지지 못한(했을) 안정적인 가정(아이), 시간적인 여유로움, 경제적인 자유로움 등이 있지 않은가. 난 충분히 지금 나대로 멋지고 아름다운데 말이야. 그리고 말이야 20대의 젊음은 이미 나도 가져보고 그만큼 누려봤던 거라 이제 크게 아쉬움은 없다.
딸아이가 언젠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가고 싶어?" 그때 나의 대답은 아마 이랬던 것 같다. "글쎄. 굳이 가야 할까 난 지금이 너무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