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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작 Jan 26. 2024

이것이 말로만 듣던 여적여?

경단녀의 밥벌이 이야기08

사람은 왜 일을 해야 할까?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본능을 채우기 위해, 그러니까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이다. 나는 한동안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행복한 일, 본질적으로 뇌가 도파민을 일으킬만 한 행동만 추구했다. 그 결과 한참을 인내해서 해야 하는 것들은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대체로 불행했던 내 삶을 반추하며 '행복하지 못한 상태'를 너무나 괴로워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본능의 관점에서 봤을 때 환상이자 이룰 수 없는 망상이라고 주장한다.

돌이켜 보면 맞는 말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사실 뭐 그렇게 원대한 뜻이 있었을까?

그저 풀을 만들고 나무를 만들고 물고기를 만든 것처럼 인간을 만들었을 뿐인데, 왜 유독 인간만 행복을 고집해야 하는 걸까?


다시 돌아와서, 출판 일을 해야만 행복하다는 관념을 버리고 돈을 벌어야 했다. 내 본능이 행복보다는 물질을 더 추구했으니까. 결과적으로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했.


그래서 생전 해보지 않았던 콜센터에 지원하게 된 것이다.


사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해외로 떠날 요량으로 S화재 콜센터에 취직한 적이 있다. 거기서 1년 바짝 일하면 유학 갈 경비는 충분히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3주 동안 교육만하다 나왔지만 대기업이라 그런가 교육수당을 꽤 짭짤하게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였을까, 국가기관에서 운영하는 콜센터 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퇴근 시간이 보장되었고, 웬만하면 잘릴 일도 없어 보였다. 안정적인 직업으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물론 유리멘탈인 내가 겪을 감정노동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런 두려움보다 쪼들리는 생활비의 두려움이 더 컸으므로 상관없었다.


면접 당일.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부리나케 준비했다. 공공기관 면접은 처음이라 살짝 긴장되었다.

사실 아이 낳기 전, 이런저런 회사와 출판사를 총 여섯 군데 정도 다녔는데, 서류를 냈을 때마다 다 합격했던 터라 이번에도 당연히 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자만이 깔려 있었다.


머리를 단정히 묶고 남색 쟈켓과 검정 치마가 그나마 면접 의상 같아서 그렇게 입고 면접장소로 향했다.

와, 생각보다 지원자가 많았다. 지금 기억엔 백여 명도 넘었던 것 같다.

7~8명이 한 조가 되어 면접 장소에 들어갔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그런 면접을 드디어 해 보게 되는 구나.

신기하기도 했다. 예상 질문지를 열심히 읽어 가며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극 I이지만 어릴 때는 나서길 좋아하는 완전한 E성향 아이였다. 커갈수록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두려워졌지만, 안 쫀 척, 뭘 좀 아는 척 하는 데는 자신 있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답을 듣길 원하는지 엄청 눈치를 보고, 머리를 최대한 가동시킨다. 상대방의 표정, 말투와 억양, 내가 대답했을 때의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면접 때마다 합격했던 것도 그때문이지 싶다. 물론 아주 작은 규모의 회사들 뿐이었지만.


아무튼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면접을 보게 됐다.

면접관은 모두 여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표정 없는 면접관들이 준비된 공통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왜 지원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왜 당신을 뽑아야 하죠?"

"경력이 없는데 잘할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을 리드해서 성과를 내 본 적이 있나요?"

"고객이 막무가내로 항의할 땐 어떻게 할 건가요?"


예상 질문들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좋고 타인을 잘 이해할 줄 안다. 적성에 맞는 일입니다."

"다년간 직장생활을 했고, 동료들과 잘 지냈다.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줄 알며, 업무 습득 능력이 빠르고 성과를 잘 낸다."

"S화재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으며, 구성 작가로 일할 때 인터뷰를 많이 했다. 경청을 잘해 업무를 배우면 금세 적응할 수 있다."

"노동조합 교섭 때 동료들의 의견을 취합해 긍정적인 협의를 이끌어낸 적이 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면서 최대한 고객의 심정을 헤아리는 데 집중하겠다."


대체로 이런 식의 대답을 했고,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대답을 하면서도 만족스러웠고, 긴장감은 조금씩 해소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에서 말을 버벅일 수밖에 없었다.


"김시 지원자는 아이가 한 명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있나요?"

"아, 그게.. 지금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습니다. 출퇴근 시간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거네요? 아이가 아프면 어떡할거죠? 당장 와줄 사람이 있는 거예요?"

"음... 당장 와줄 사람은 없지만 남편과 조율할 수도 있고,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최대한 해결하도록 노력할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나에 대한 개인 질문은 끝이 났다.


결과는 예상대로 탈락이었다.

경력 부족 탓이었는지(신입 모집이었지만), 노조 얘기를 꺼낸 탓인지,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였는지, 그저 자격 부족이었는지 모르겠다.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채 일을 하고, 동료들과 점심 시간에 담소를 나누고 내 능력으로 돈을 벌어 아이 키우는 데 부족함이 없길 바랐다. 그런데... 서류 탈락은 해봤어도 면접 탈락은 처음이라 충격이 좀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현실의 쓴맛을 보지 못해 자만과 오만이 남아 있던 터라, 탈락의 원인을 마지막 질문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고졸자 이상 지원에 전문대졸 학력으로 지원했고, 나이도 됐고, 면접도 잘 봤으니 분명 붙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만약 정말 마지막 질문 때문에 탈락한 거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억울했다.

물론 어린이집 처음 등원했을 때는 자주 아팠다. 그래서 일을 할수가 없었다. 병원을 내 집처럼 들락거리고, 입원도 수차례 했다. 간병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당연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럴 시기도 지났고, 면역력도 생겼고 다닐만 해서 지원한 건데 아이가 아프면 어떡할 거냐니...


나에게 그 질문한 면접관은 분명 시어머니나 친정에 아이를 맡기며 일했을 것이고, 일에 지장없이 회사 생활을 했을 것이다. 워킹맘으로서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겠지만, 그 뒤에 분명 아이를 키워 줄 누군가가 있었겠지. 아니면 관리직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여직원들이 아이가 아프다는 이유로 결근이나 연차를 내는 바람에 다른 직원에게 피해를 준 일도 숱하게 봤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이가 아프면 엄마, 외조모, 조모가 희생해야 되는 걸까? 아이를 간병하는 것은 무조건 엄마의 몫이고, 회사에서도 연차를 내야 하는 건 왜 꼭 엄마여야 할까? 아니 아이가 아플 때 연차를 내는 것이 왜 문제일까?


생각할 수록 화가 치밀었다.

지금도 여전히 주변 친구들을 보면 아이가 아플 때 연차를 내는 것은 항상 엄마인 내 친구들이다. 회사에서 눈치 준다고 짜증난다고 육퇴후 맥주 한잔으로 서러움과 고단함을 달래는 것도 엄마인 내 친구들이다.


7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이가 아프면 간병해야 하는 것은 엄마다.

왜일까? 엄마가 간병을 더 잘해서? 엄마가 모성애가 더 강해서? 엄마가 하는 일은 아빠가 하는 일보다 덜 중요해서?


아빠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있으니까.

사회가 남자가 육아나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니까. 자연스럽게 일하는 아빠는 육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 여전히 엄마의 몫인 탓에 여자들이 출산을 꺼리거나 기피하게 된다.


그러니 정부에서 저출산이 걱정이라면 이 문제부터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아이가 열살 될 때까지 육아로 인해 일을 못하게 된 경단녀 엄마에게 월급을 주지 않을 거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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