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를 보고 순간 월 150만원인가 했었는데... 월 125만원, 세후 100여만 원을 받고 일했었다니.
새삼 그때 물가는 얼마나 쌌던 건가 싶다.
당시 저 출판사도 대기업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던 분께서 만든 출판사였는데 설립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외주일도 많이 받았고, 체계도 없던 데다가 그때 근무하셨던 편집팀장님이 내가 입사한 지 두 달만에 그만두셔서 혼자 거의 편집일과 모든 잡무를 맡았더랬다.
아, 그래도 그당시 야근수당은 꼬박꼬박 챙겨 주셨던 기억이 지금 문득 스쳤다.
각설하고.
2주나 브런치 글을 쓰지 못했다.
지금 다니는 출판사는 야근도 없고 노동강도도 세지 않다. 딱 좋다. 그치만 요즘 집을 알아봐야 될 때가 돼서 그런가 마음이 어수선하다.
사실 난 경단녀였지만, 지금은 다시 일을 다니고 있으니 경단녀는 아니고 이혼한 지 얼마 안된 이혼녀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OO녀라고 칭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지금 내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해 줄 단어가 딱히 없어서 편의상 이혼녀를 언급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발행물 말고 다른 글에서는 이미 언급했지만.)
이 시점에서 이혼을 언급하는 까닭은 내가 왜 그토록 다시 일을 하고자 했는지 이야기 하기 위해서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적성에 맞고, 밥벌이를 할 수 있게 해 준 직업을 그만둔 다는 것은 생각보다 데미지가 컸다. 육아와 일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이 누구에게는 불편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난 육아가 전혀 적성에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하겠지, 누가 육아를 적성으로 하겠나.
내가 육아를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는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서였다. 출판일은 다른 제조업에 비해 한 상품을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몇 년에 걸쳐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출판사도 있다. 상품의 주된 요소(원고)를 만드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만드는 일은 예전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장인 정신이나 프로 정신을 가지고 만드는 사람도 많다. 그렇게 만드는 데 오래 걸리는 책도 어째뜬 마감이라는 것을 한다.
마감을 하고, 인쇄를 하고, 독자에게 인정받기까지 몇 년이 걸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1년 안에 승부가 난다. 그런데 육아는 다르다.
1년, 2년... 아이는 발달 상황에 맞춰 성장하지만 아이의 성장이 나의 육아 능력을 반영한 결과는 아니다.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 키워도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않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대충 키워도 뛰어난 능력을 발하는 아이도 있다. 게다가 한 사람을 키우는 일은 최소 20년, 열과 성을 다해 인내하고 지켜보고 뒤에서 버텨 줘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과가 어떨지 전혀 알 수 없는 프로젝트. 그런데 그 과정을 함께한 동료가 같이 일해 주고 설령 결과가 나쁘다 하더라도 서로 격려해 주면 그동안 일한 시간이 결코 무의미하진 않을 텐데.. 내 경우 동료가 문제였다.
어떤 프로젝트를 20년 한다고 했을 때 반드시 좋은 동료가 필요하다. 결정권자가 없는 이 프로젝트에 오로지 동료와 나 둘이서 이 일을 헤쳐나가야 하는데 동료는 프로젝트에 미온적 태도를 보인다면 어떨까. 다행히 아이 아빠인 동료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나와 같았다. 다만 동료는 프로젝트의 제작비를 벌어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단했으므로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임신 기간 내내 친정에서 홀로 입덧하며 출퇴근 했어도, 2년 동안 잠 한번 제대로 잔 적 없어도, 육아휴직급여마저 끊기고 생활비가 부족해 한 푼이라도 벌어 보고자 구직 사이트를 뒤적였을 때도,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가 각종 전염병에 걸려 병간호를 해야 했을 때도.
동료가 육아에 참여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적은 것, 내 미래를 함께 고민해주거나 당장의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려는 의지가 없는 것, 따뜻한 위로나 노고를 몰라 주는 것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아이가 크고 나서도 말문이 트이지 않았을 때 그동안 참았던 것이 터졌던 것 같다. 언어 치료 센터니, 발달치료니 다녀야 해서 바우처를 알아보고 아이의 발달을 위해 공부를 하고, 아이 말을 트이게 하기 위해 절박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닐 때조차 관망적인 태도를 보였을 때 동료에 대한 애정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래도 아이는 아빠를 좋아했고, 아빠도 놀아 줄 때는 즐겁게 놀아 줬다.
그런데 아파트 대출금에, 아이 센터 치료비에, 생활비에... 정말이지 이건 도저히 외벌이로는 삶을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간당간당한 삶에 명절이나 경조사라도 있는 달이면 정말 대출이라도 받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는 동안만이라도 일을 하면 좋았겠지만, 아이가 말이 느려서 국공립 유치원 특수교육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다들 알겠지만 유치원은 2시면 끝난다. 집앞 유치원을 반 년 다녔는데, 특수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치원은 차로 20분 거리 다른 동네에 밖에 자리가 없어서 2학기 때부터 유치원을 옮겼을 때의 심정이란...
그당시 나의 모든 문제의 해답은 돈이었다.
치료 센터 수업을 늘리고, 생활비에 허덕이지 않고, 나와 동료, 아이 세 사람의 심신 안정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벌이.
평생 굶어 본 적은 없으나 언제나 풍족하지 않았으므로 갈망했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늘 밥벌이를 했다. 그치만 일을 하면 돈은 다달이 들어왔으니 그만하면 사는 데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영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당장도 그렇지만, 혹여 아이에게 부모가 사라진다면, 스스로 밥벌이조차 할 수 있을지 의문인 이 아이에게 적어도 최소한의 안정장치가 되어 줄 수 있도록 부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이토록 돈에 집착하고,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그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