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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작 Feb 04. 2024

이 직업의 좋은 점을 꼽으라면

경단녀의 밥벌이 이야기 09

현재 편집일로 밥을 벌어 먹고 산다.

대략 15년 전에 이 길에 들어섰고, 출산 후 4년 정도 쉬다가 프리랜서 일을 했으니 쉬었던 4년을 빼면 11년 동안 책과 관련된 일을 해왔던 것이다.


출판은 사양산업이라는 말을 입사 초부터 들어왔다.

사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데 무슨 수로 책을 팔 수 있을까?

그럼에도 책을 사는 사람이 있고, 책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도 있다.

OTT 덕에 영화관도 잘 안가는 마당에 책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실 내가 이 이야기를 쓰고, 계속해서 무얼 쓰는 것도 결국엔 출간을 하고 작가가 되고 싶어서이다.

읽는 사람은 없지만 말하는 사람은 많다는 건

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남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런치를 통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조그만 안도를 한다. 좋아요가 많으면 그 글은 왜 많은지, 적은 글은 왜 적은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왜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도 생각해 본다.  결국 어떤 콘텐츠든 초반 몰입 속도에 있는 것 같다.


영화도, 영상도, 글도 초반 몰입이 빨라야 수요자를 조금이라도 더 붙들 수 있다.


<<도둑맞은 집중력>> 저자는 우리의 집중력을 빼앗아 가는 것이 단지 휴대폰이나 개인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의 많은 콘텐츠들이 즉흥적으로 표출하도록 유발하고, 빨리 유행하며, 빨리 사라지게 만든다.


많은 콘텐츠들이 500미터 쇼트트랙 선수처럼 질주하다 사라지는데  출판 시장의 콘텐츠는 그들 사이에서 3000미터를 걸어가야 하는 종목이니

상대가 기 힘들다.


그렇게 위태롭게 사라질듯 사라지지 않는 출판업에서 내가 책을 '사는(읽는 게 아니라)', 그리고 이 업계를 마지막 직업으로 '삼은' 이유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허영 때문이다.


명품을 사면 자기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는 허영 때문에 명품 산업이 죽지 않는 것처럼

책을 사면 지적 능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허영 때문에 난 꾸준히 책을 사고 그 허영 때문에 이 산업이 완전히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사는 사람 중에 진심으로 '읽는' 독자의 비율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사는' 사람이 줄어들 뿐 지적 허영을 채워주는 것은 금방 휘발되는 OTT가 아니라 오로지 책뿐이다. 그래서 가끔은 언제 읽을지 모를 500p가 넘는 두꺼운 책도 사고, 전집도 산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책장의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한다.


또 하나

이 업계 있으면 정말 그럴 듯한 사람이 된 것 같다.


박봉에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회사원이지만

어떤 콘텐츠를 기획하고, 어울릴 만한 작가를 섭외하고, 어떻게 홍보하면 좋을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씩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좋다.


그리고 때로 내가 기획한 책은 아니지만 책을 위해 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얼마 전 S병원 소아신경외과 의료진과 영양팀, 요리개발 전문가들을 만나 책 기획을 위해 TF회의를 했다. 항 의사선생님에게 도움을 받기만 했는데 회의 때는 의사선생님들에게 책 전체 일정을 어떻게 짜야 하는지, 제작비는 얼마나 나오는지, 콘셉트는 어떻게 잡는 것이 좋은지 등등 조언을 해 주었을 때 그동안 일한 세월이 허송한 건 아니었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했다.


또 하나 나를 한 분야의 전문가로 대해 주시는 교수님 에티튜드는 의외였다. 국내 최고 대학병원 중 하나, 한 과의 최고 교수님이시니 그저 작은 출판사 편집자쯤은 신경도 안 쓸 줄 알았는데, 내가 제안한 콘셉트에 대해 진지하게 경청하고, 고려해 주시는 모습에 감동 아닌 감동을 받기도 했다.


나는 타인의 그런 태도에 쉽게 감동하고, 효용감이 올라간다. 어쩌면 그런 인정을 받기 위해서 일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인정들이 쌓여 결국 내가 만족할 만큼 목표에 도달하면 마지막으로 내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게 나란 사람이다.


좋아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두 부류다.

진짜 밥벌이를 위해서 닥치는대로 하는 사람, 돈이 되니까 하는 사람.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다.

내 자신을 누구보다 아끼는 사람.


그 분야가 돈이 되건 안 되건 내가 싫어하는 짓은 죽어도 못하는 사람.

적당히 현실에 타협하면서, 그냥 그렇게 대충은 못 살겠는 사람.

자신의 행복이 돈보다 중요한 사람.


그런 사람 아닐까?      

나의 밥벌이는 그렇기에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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