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밖으로 나온 이유
경단녀의 밥벌이 이야기 11
- 감각적으로 지나치게 자극을 받는 탓에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감각 과민증 환자들.
-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들이 터져 나오기 때문에 취사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들이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얼굴을 붉히거나 욕을 퍼붓거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거나 매우 선택적으로 호기심을 쏟는 사람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중에서, 크리스텔 프티콜랭 저, 부키
위의 내용은 정신적 과잉 활동(PESM)의 특징이라고 한다.
단언컨데 나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다. 사는 내내 그래왔다. 책에서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정체성의 공백을 메우고 배척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거짓 자아'를 만든다고 한다.
아기는 엄마와 떨어지면서 자기의식을 갖게 된다. 그 후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이미지'를 형성한다고 한다. 긍정적인 메시지를 많이 접하면서 자란 아이들은 건강한 자존감을 소유하고, 그렇지 못하면 빈약한 자존감을 갖게 된다.
6살 무렵 아버지가 집을 나갔고 엄마가 양손에 나와 동생을 데리고 다니며 아버지가 일했던 현장, 지인 들 집에 찾아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핸드폰이나 위치 추적기도 없던 그때. 아버지는 완벽히 증발했다. 그후로 어른들은 나만 보면 네가 장녀니까 잘해야 된다.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동생 잘 돌봐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일곱 살 아이에게.
최근 웡카 개봉한 뒤 생각 나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다시 보았다. 아주 찢어지게 가난하고 허름한 집에서 조부모, 외조부모, 부모님과 함께 사는 찰리가 돈 많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는 아이들보다 착한 심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어른들로부터 긍정적인 메시지를 접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안타깝게도 일곱 살의 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런 말을 들으며 밝고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형성하지 못했다. '먹고 살아야' 하는 근본적인 일에 대한 불안과 장녀로서의 '책임감'이 거짓 자아를 만들게 했다. 텔레비전을 보며 배우나 가수가 되고 싶다는 아이다운 꿈은 엄마나 친척들로부터 얼굴 때문에 안 된다거나, 돈이 없어서 안 된다거나, 그런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거울을 보며 배우를 따라라하고 연기 연습을 했던 어린 소녀는 점차 장녀라는 가면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채 출퇴근길 인파에 떠밀린 사람처럼 살아왔다고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그런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도 끝끝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방향을 수정했고,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고 생각이 많다는 건 피곤한 일이다. 집에 있으면서 그 생각들은 자꾸만 사소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흘러갔다.
아이가 더이상 안 좋아지면 어떡하지?
노후에도 손가락 빨고 있으면 어떡하지?
집값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빨리 부자가 되고 싶은데 현실은 왜 이렇게 팍팍하지?
등등
누구나 하게 되는 고민들, 생각을 터놓고 말할 사람은 당시 남편뿐이었다. 친구도, 직장 동료도 없는 외딴 곳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 남편은 나와 완전히 반대 성향을 갖고 있어서인지, 원래 남자는 다 그런 것인지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왜 그런 쓸데 없는 걱정을 하지? 라는 식이었다.
나는 그런 걱정과 고민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궁금해 해주길 바랐고, 같이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럴 일 없어, 걱정 마, 안 돼,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와 같은 피드백이 오자
나 혼자 그 고민을 풀어나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내가 고민의 실타래를 붙잡고 혼자 끙끙대며 풀어나가는 동안
남편과 나는 점점 멀어졌고, 대화는 단절되었다.
다시 미로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좁은 통로에서 이리저리 발을 동동 거리며 몇 발자국 옮겨 보지만 결국 또 벽이 서 있는 미로. 출발 지점에서 손을 잡고 있던 남편과 아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나 혼자 이리저리 길을 헤멘다. 경력도 단절되었고,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단절되었다. 아니 나의 정체성이 어디 있는지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허우적거렸다.
공자가 이런 말을 했다.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늘 가까이에 근심이 있다."
당장 미로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미로 속이 아닌 위에서 길을 찾아야 했다.
미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잠식해 버릴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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