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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작 Apr 05. 2024

내가 보험설계사라니2

경단녀의 밥벌이 이야기15

메인 이미지 출처: @김퇴사 작가


어떤 공인(?) 시험에 합격한 건 그때가 두 번째였다. 남들 다 따는 운전면허 시험도 기능에서 4번이나 떨어졌....^^;;

아무튼 설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인턴 기간을 거치게 되어 있다. 합격 뒤에도 꾸준히 약관 공부를 해가며 나혼자 레벨업 마냥 퀘스트 같은 것들이 주어지는데 그 첫 번째 관문이 바로 20명의 개인정보를 모아오는 것이었다!


아니 친한 사람한테 돈 한 푼 못 빌리는 나인데... 차라리 10만 원을 꾸면 꾸었지 개인정보라니...

그 사람의 집주소 주민번호까지 알아오라는데 당장 내 등본 떼서 나오는 가족 말고 누가 주민번호를 알려주겠는가!


난 첫 퀘스트부터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동안 공부한 게 아까운데. 돈은 벌어야 하는데. 퀘스트를 내 준 선생님은 이 관문을 통과하면 이후의 일들은 식은 죽 먹기라고 했다. 당연하지. 주민번호 같은 개인정보를 넘겨 준다는 것은 가족에게도 알려주기 껄끄러울 만큼 중요하고 민감한 정보인데..

 

무리 친한 사이라도 누가 해주겠냐고. 가족끼리 보증도 서는 게 아닌데. 아무튼 가장 첫 번째 칸에 전남편, 엄마, 동생 주민번호와 주소를 적고 나니 더이상 누구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꾸역꾸역 어렵게 외가쪽 사촌 언니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나이 차이는 좀 났지만, 어릴 때 한동네서 잠시 살았던 데다가 엄마가 자매들끼리 친해서 그 자녀들도 친형제마냥 친하게 지내고 있더랬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둘째 사촌언니 번호를 누르고 통화를 시도했다.


언니 내가 이래저래서 보험설계사가 됐는데 숙제로 스무 명의 주민번호를 알아오라네? 미안한데 이거 절대 유출 안할 테니까 나 믿고 알려줄 수 있어?”


안다. 이런 전화는 친할수록 거절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내 방식도 잘못되었다. 부탁하는 식으로 말했으면 안 됐다. 언니도 난감한듯 말을 잠시 잇지 못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용기내서 다시 한번 설득해보았지만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언니를 원망하는 건 아니었지만 영업의 영자도 몰랐던 나는 기세가 완전히 꺾여 버렸다. 언니에게 난감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이걸로 아무것도 안 할거라면 그냥 아무번호나 적어서 낼까?도 싶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보험설계사라니, 당신 성격에 그런 걸 어떻게 하겠냐는 남편에게 보란듯이 증명하고 싶었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나도 월 300 벌면서 내 새끼 해주고 싶은 거 다 해주고, 나 하고싶은 것도 다 하며 살거라고. 생활비 100만원에 벌벌 떨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아직 말도 못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 가며 시작한 일인데 어떻게 첫 퀘스트에 포기할 수 있을까.


마음을 다잡고 두 번째 전화번호를 눌렀다ㅡ. 이번에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은 남사친이었다.


왜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오랜만에 연락온 여사친 혹은 전 애인에게 설레서 만났다가 종국엔 보험 들어달라고 하지 않나. 내가 딱 그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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