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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Jun 03. 2020

어제로부터

삶을 비울 수 있는 순간이란 없다.


  음악이 연주되는 사이에 잠시 생기는 소리의 공백, 그것을 하나의 곡의 연주되는 데 있어서 단절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역시도 연주의 일부로 보는 것처럼, 삶에 있어서 공허 또는 무료가 가지는 의미도 삶의 단절이 아니라 일부인 것 같다. 소리의 공백이 그 이전과 이후의 소리에 대한 민감도를 높이는 것처럼 삶에서의 공백 역시도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의미에 대한 민감도를 높인다. 따라서 그 공백을 빠른 시간 안에 무언가로 채워 넣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공백이 아닌 것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 공백 안에서 느끼는 내 감정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 필요한 듯하다. 


  그런데, 그 공백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진다면 어떨까? 


  과거에는 공백은 충분히 공백다웠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나서 마치 잠깐 맑은 하늘을 만난 것처럼 공백은 찾아왔고 이전까지 머릿속을 채우던 많은 생각들을 리셋하고 다음에 올 것들을 기다리며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공백은 점점 늘어난다. 바쁘지 않은 날 가운데 그보다 더더욱 바쁘지 않은 날, 오히려 공백이 없는 촘촘한 시간들이 내게 더 드물어지는 것이 늘어나는 삶 말이다. 그쯤 되면 이것을 공백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가 싶어 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그 공백 안에 채워 넣어 인위적으로 늘어난 시간들을 줄이는 것이 옳은가? 지난날의 공백에서 느꼈던 기분을 다시 찾기 위해 스스로의 등을 떠밀어 어디로든 나는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나는 선뜻 '그래야 한다'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분명한 이유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결국 임시적인 것일 뿐 나날이 늘어나는 공백들을 모두 채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이 전부일 줄 알았던 시기라는 것은 삶의 어느 한 때의 일일뿐 모든 삶이 그와 같지는 않다. 


  삶이 지난날과 달라졌다면 나 역시도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내가 고작 써 본 공백이라는 것이 며칠치의 처방밖에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다시 바쁠 것이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누리려고 하는 생각에서 나온. 그때의 공백은 생각을 버리는 것에 유효하게 작용하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길어지는 공백에서 생각을 버리는 것은 삶을 방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길어진 공백에 대처하는 것이란 생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더 깊게 끌고 가는 것을 배워가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본의와 다르게 치고 들어오는 일들로 예기치 않게 생각이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때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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