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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성장 촉진제

이만큼의 주기가 좋아

by 얄리
열정과 냉정 사이
너는 또 다른 나


우리는 서로를 이렇게 불렀다. 처음 연을 맺게 된 것은 '회사 동료'였지만, 지금은 과거의 연에 대한 기억이 의미를 잃었다. 서로의 거리를 잴 수 없을 만큼 삶의 깊숙이 들어와 앉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행복한 삶을 산 거라는데, 그런 사람이 이미 존재하는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너, 하나면 족하다.


한 사람은 워킹맘으로 다른 한 사람은 전업주부로 각자의 가정을 두고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다가 문득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마음속 이야기 주머니가 꽉 찼다는 신호다. 누가 먼저 불렀든 간에 상관없이 나는 가장 가까운 날의 연차를 잡는다. 한 달에 한번 꼴로 얼굴을 보지만, 마치 어제 서로 만나 얘기한 후 헤어졌다가 오늘 다시 만난 것처럼 서로 간의 이야기는 바로 이어 보기 하듯 흘러간다.



늘 만나는 그곳에서 늘 먹던 빵과 늘 마시던 커피, "나 말이야"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만날 때마다 한 뼘씩은 더 자라서 오는 친구. 서로 떨어져 지내는 동안 많은 부침이 있었고 상처를 입었고 스스로 응급처치를 한 후 내 앞에 앉아 있는 너는 늘 그 시간만큼 자라서 왔다. 서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다 보면 불시에 눈이 충혈되고 눈물이 고인다. 이야기를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같은 것을 느끼는 까닭이다. 살짝의 면박으로 웃음을 주고,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말을 대신해 주며 삼키지 못했던 덩어리를 녹여낸다.




아직도 여전히 과거 안에 사나 봐


서로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불행했던 조부모 밑에서 자란 부모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을 우리는 우리의 자식에게 끼친다. 부자 3대가 이어지는 것이 쉽지 않다지만, 불행의 굴레가 3대를 이어가는 건 어렵지 않은 모양이다. 그 지난한 반복은 가정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가 끊어내야 한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은 욕망이 사실, 자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난날 그렇게 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보상일 때가 있다. 과거로 돌아가 삶을 바꿀 수 없는 까닭에 바꿀 수 있는 미래를 재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식에게 거는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현재 삶은 또다시 방치된다. 우리가 끊어내야 할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상처 받은 자신이 보내는 속삭임'이다. 과거의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속상하게 했을까?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동양인은 되려 하고 서양인은 하려 한다는 말이 있다.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하니?” 적지 않게 들어 본 말이 아닌가? 뭔가가 되기 위해서 세상은 우리에게 한눈을 팔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만큼 늦어지고 결과를 얻기가 어려워진다고 말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어" 시간은 점점 우리를 세상에서 지워가는데, 여전히 자신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조바심이 난다. '무엇이 될 수는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무엇을 하든 입으로는 '단지 일상의 권태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욕심 없이 시작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뭔가의 이름을 얻기를 바라다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걸까? 우리가 차마 꺼내놓지 못한 그 욕심이라는 건 대체 뭘까? 그토록 바라던 것이 되고 나면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이 맞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타인은 한 마디로 자기 아닌 사람을 그다지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자신의 머리를 점령당한 듯이 다른 누군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다면, 그건 누군가라 불리는 타인이 아니라 누군가의 눈에 비칠 자신일 거다. 타인의 눈에 비칠 모습을 설명해 보자. 딱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들 역시도 그들 각자의 삶으로 이미 꽉 차 있다. 그러니 타인의 얼굴을 하고 우리 안에 들어앉아 있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거다. 왜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는지를. 얼마나 견디기 힘들어하는지를 말이다.


흔들리는 배에서 당장 내려


배를 탄 후 멀미를 하는 것은 개인차가 있다. 그리고 배를 조정하는 선장의 능력도 개인차가 있다. 뱃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과 조정을 개같이 하는 선장이 만나면 답이 없다. 뱃멀미를 덜 할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겠지만, 조정을 개같이 하는 선장의 배에서 내리는 일을 바로 할 수 있다. 조금만 찾아본다면 갈아탈 수 있는 배가 주변에 꽤 있다. 선장의 눈치를 살피며 '견뎌내야만 한다'라고 웅크리고 앉아 입을 틀어막을 일이 아니라 당장 타고 있는 그 배에서 내려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어쩌면 그 선장은 무면허이거나 선장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부랑자일 수도 있다.




각자가 자기 안에 갇혀 있으면 쉽게 찾아지지 않던 길이, 서로를 마주하면 조금은 더 수월하게 찾아진다. 다만 그러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털어놓는 일이 무의식 중 한숨을 쉬는 일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럴 수 있는 대상이 내 삶 안에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하지만 그런 대상을 매일 끼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삶에서 느낀 것들을 품고 우리는 마주해야 한다. 서로에게 해 주는 말은 자기 안에 있는 경험과 생각에 닿아야 삶을 바꾸는 약이 되니까 말이다.


지금 딱 이만큼의 자리가 좋아
우리 건강하게 오래 살자


점심시간을 훌쩍 넘어서까지 이어지던 얘기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같이 하고서는 친구의 집까지 또 한참을 걷는다.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코 앞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기 위해서. 귀가하는 길에 한참을 생각에 잠긴다. 나누었던 말들을 다시 되새기며. 다음의 연차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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