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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기 좋은 날

노래방 죽순이 출동

by 얄리

때가 되었다. 지하로 연결된 계단을 터벅대며 내려가면 정수리에 흰 눈이 내려앉은 아주머니가 반가운 미소로 맞이한다. “왜 이리 오래간만이래? 많이 바빴나 봐” 아는 척, “일이 좀 많아서요” 그런 척.


2번 방이 나갔어. 9번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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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상관없어요!


딱히 방을 지정해 둔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2번 아니면 3번, 그것이 나가면 9번 아니면 6번이었다. 마치 전용 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 테이블을 한쪽으로 밀어둔다. 대부분은 서 있을 것이므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탬버린은 저쪽 끝으로 밀어 놓고, 노래를 고를 책 하나와 물 두 개 그리고 맥주 한 개를 나란히 놓은 채 마이크를 빼서 점검한다. 잠시 앉는다. 책을 뒤져 5곡을 내리 선곡한다. 5곡에 한번 꼴로 쉬어갈 것이다. 나만의 선곡 룰이다.


160분, 세팅 완료


“2시간이요”라고 분명히 말했지만 언제나 시작은 160분이다. 종료되기 십여분 전쯤부터 30분씩 자동 추가, 물론 비용은 올라가지 않는다. “사장님이 자기 오면 나가기 전까지 무조건 시간 넣어주라고 했어. 우리 집 특급 단골 중 하나라고” 그랬단다. 하긴 이곳에 쓴 돈과 시간만 해도 그럴만했다. 임재범의 '비상'은 마이크와 목 상태 점검용 곡이다. 고개를 꺄우뚱거린다. "오늘 좀 별로인데" 난항 예감!




그러니까 '나 홀로 노래방 죽순이'가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대게는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2차 내지는 3차 즈음에 노래방에 가곤 했다. 여러 명의 사람이 빼곡하게 둘러앉아 서로 눈치게임을 하듯 노래방 책을 이러 저리로 토스하고 "아, 나 노래 잘 못하는데"하며 노래를 시작하면 "에이~ 뭐 잘하는구먼"이라는 화답하는 분위기, '이 노래를 부르면 분위기 다운된다고 싫어하겠지?' 하며 가급적 다 함께 탬버린을 치고 내가 부르는지 네가 부르는지 모를 떼창을 유도할 수 있는 곡을 내키지 않으면서도 선곡하는 분위기, 술기운이 많이 올라 음과 박자를 맞추는 건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채 입을 연신 뻐끔거리는 분위기, 예의 없게 부르던 노래를 "아이고 어떻게 잘못 눌렀네"하며 끊어버려도 "어차피 1절만 하려고 했어. 내가"하며 언짢은 표정을 애써 감추려는 분위기, 그런 분위기가 싫었다. 놀려고 가는 것인지 아니면 노는 분위기를 맞춰주려 가는 것인지 여하튼 뭘 맞추려고 노력하는 내가 못 마땅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가득 차면 자연스럽게 입 안에 몇 곡의 노래가 맴돈다. 때가 되었다는 신호다. 혼자서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거나, 조용히 부르다 목이 메이거나, 대차게 틀려서 웃음이 터지거나, 차마 부를 수 없어 배경음악으로 깔거나 하면서 공간 안에 홀로 앉아있다 보면 가슴속에서 향긋한 바람이 불었다. 때때로 노래는 거의 하지 않고 앉아서 핸드폰으로 서핑을 하거나,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제안서를 펼쳐놓고 빨간펜질을 하거나, 부르고는 싶은데 잘 알지 못하는 곡을 크게 틀어 놓고 따라 해 보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주변의 간섭이 없이 독대를 하고 싶은 사람과 얘기를 하는 곳으로도 쓰였다.


노래하는 게 취미예요?
노래 잘하시나 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난감했다. 쏟아부은 돈과 시간을 보면 취미라고 하기에는 무거웠고, 뻔질나게 다녀도 노래실력은 고만고만한 것을 보아 확실히 특기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하도 자주 드나드는 게 포착이 되다 보니 "언제 한번 노래 들으러 함께 가야겠어요"라는 말을 듣게 되기도 하는데 정말이지 질색이다. 함께 모인 사람들을 의식하며 노래를 하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그냥 함께 인 것이 싫다. 그러니 "제발 하고 바라는데 신경 꺼 주셔라"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저 "다음에요"라며 꼬리를 살짝 내리는 것이 더욱더 싫다. 이쯤 되면 1인 코인 노래방을 가면 되지 않겠나 싶지만, 일단 노래를 서서 부르는 게 습관이고, 좁은 공간에서는 폐소공포증 같은 울렁임과 갑갑증이 몰려와 갈 수가 없다. 그러니 혹이라도 함께 가고픈 생각일랑 아주 먼 미래로 미뤄두길, 홀라당 까먹으면 더 좋고.




혼자만의 자유를 위해 찾게 된 이 곳도 방문의 주기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서 선택했지만 그곳에도 사람은 있어서 말이다. 자주 찾다 보니 그곳의 사람들은 내가 가끔 손님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선불을 위해 계산대에 섰다가 30여분을 넋두리 받이가 되기도 하고, 늦은 시간 손님이 갑자기 비었을 때 무섭다고 꾸역꾸역 내 시간을 연장하며 함께 있어달라 붙잡기도 한다. 자주 마주치는 손님들 중에는 익숙해진 선곡 퍼레이드 때문에 일면식도 없는 옆방 손님이 친구로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허락 없이 문을 벌컥 열고는 내가 부르는 노래가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곡이라며 함께 부르면 안 되겠냐고 하는 사람들도 종종 만난다. 이럴 때는 한동안 발걸음을 멈춘다. 다시 낯설어지기 위해.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때도 있다. '특급 단골 손님 중 하나'인 나와 또 다른 누군가가 공교롭게 방과 방 사이로 들려오는 노랫소리로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릴 때. 내 방에서 나오는 소리도 하나, 그 사람의 방에서 나오는 소리도 하나다. 각자 혼자 방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유형의 곡들이 서로 교차되듯이 선곡되고 불려진다. 내가 부르고 나면 그가 부르는 식으로. 잠시 선곡을 하기 위해 쉰다는 명목으로 서로의 노래를 방 건너에서 듣는다. 때때로 의도치 않게 노래의 가사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이어지는 곡들 부르게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힘들고 외로운 하루를 노래하는 곡에 이어서 고민은 내려두고 쉬라고 노래하는 곡이 이어지는 것 같은. 시간이 다 되어 방을 나설 때 조금의 엇갈리게 시간차를 두어 문을 연다. 소리가 아닌 얼굴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벌써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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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이 있어서요


아주머니에게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터벅거리며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다. 벌써 밤이 많이 깊었다. 들어갈 때와 사뭇 다른 공기를 느낀다. 집까지 걸어가며 불렀던 노래 중에 몇 곡이 머릿속에서 다시 플레이된다. 한동안 노래를 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은 딱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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