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거나 무섭거나
내가 아닌 사람들을 나는 알 수가 없다. 내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많은 면 중에 한 면 일 뿐이다. 우리는 상대의 프로필을 보고 있을 뿐 상대의 실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의 행복이나 불행을 과장하는지 축소하는지, 나를 진심으로 존중하는지 무시하는지, 서로가 절실히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는지 더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아는 만큼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신경은 쓰인다.
개인의 사생활이 모두 녹아 있는 핸드폰 안의 메시지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타인에게 공개할 수 있을까? 식탁에 들러 앉은 절친과 절친의 일행들이 자신의 핸드폰을 서로가 볼 수 있는 범위 안으로 가져다 놓자마자, 그들의 눈동자는 이전보다 훨씬 빨리 움직인다. 폰도 보고 사람들의 시선과 표정도 봐야 하니까. 단지 가려지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간은 수치심, 배신감, 공포심, 불안감, 환멸감, 억울함, 상실감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예측불허로 튀어나오는 판도라 상자가 된다. 마지막 장면의 반전,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이 되는 것을 선택했던 현실이 그 상자에 나온 희망이 될 줄이야. 허탈한 안도감에 휩싸인다. 그래 남은 남이다.
평일 낯에 홀로 찾는 영화관은 그 시간에 관람을 하러 온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조차도 색다른 흥미를 느끼게 한다. 열명이 채 안 되는 노년 여성의 무리가 여기저기 눈에 보인다. 듣자 하니 그들에게는 '살아온 시간의 누적에 따른 특별한 할인'이 주어지는 모양이다. 그들이 아니면 영화관의 좌석들은 지금보다 더 황량했을 것이다. 세대 간에 문화를 향유하는 시점이 이렇게 달랐구나. 남들은 역시 나와 다르구나.
어느 날 느닷없이 집에서 쫓겨난 꼴이 되어 버린 남자는 한때 소설가를 꿈꾸었던 사람이었지만 이미 접은 지 오래다. 경력사항 한 줄 없는 이 남자에게 누구도 일자리를 주지 않아,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하루를 버텨간다. 이미 소설이 당선되어 작가님 소리를 듣고 사는 여자는 뭘 해도 떠오르지 않는 차기작의 윤곽 때문에 날마다 술에 쩔어 살아간다. 자꾸만 늦어지는 원고, 이러면 이 바닥에서 퇴출당할 수밖에 없다는 협박성 우려를 듣는 것도 이미 익숙한 눈치다. 이들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안에 얌전히 있어야 할 호랑이까지 탈출한 참 섬뜩한 겨울에 두 사람은 재회한다. 딸랑 사발면 한 그릇에 술잔을 기울이는 두 사람의 식탁 위에 나도 모르게 잔 하나를 살포시 내밀고 싶게 만드는 씁쓸함. 그 씁쓸함이야말로 밤을 새우게 만드는 더없이 좋은 안주가 아닌가?
대기업이 운영하는 영화관처럼 사람들로 북적이고 쇼핑과 식사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복합공간이 아닌 곳. 상영관까지 한참을 뒤적이며 헤매야 겨우 입구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문을 만나게 되는 곳. 바로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다. 가장 앞 줄에 앉은 사람, 딱 중간에 앉은 사람, 왼쪽 구석에 앉은 사람, 맨 뒤에 앉은 사람. 조명이 꺼지고 난 후, 나를 포함에 한 손으로 꼽아도 충분한 관객 밖에는 이 곳에 없다는 것에 소름이 돋는다. 만일 이들 중 오늘 하루가 죽고 싶을 만큼 사나웠던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 가득 품은 불만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 터트린다면 누가 나를 도울 수 있을까? 갑자기 당신들이 무섭다.
만약 네가 짐승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너는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네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파괴한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 채사장>
우리가 완벽하게 서로에게 타인일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 그들에게 타인이고자 했고 그들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서로를 궁금해하지 않고 자신에게 궁금증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상처를 주기도 싫었고 상처를 받기도 싫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우리는 상처 입는다.
우리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것은 누군가가 가해자이고 다른 누군가가 피해자여서 아니라,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인상이 좋았던 좋지 않았던 상대를 알아간다는 건 두려움을 지워간다는 것이다. 알기 전에 상상했던 그 무엇도 알고 난 후의 그와 닮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은 그를 알려고 마음먹기 전에 존재했던, '나는 그를 모른다'라는 전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