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진실을 알고자 하는가! 그것을 어찌 감당하려고...
TV나 영화관에서만 보던 사람들, 나는 늘 그들이 볼 수 없는 공간에 있다. 현실에서 만나면 어떨까? 보통 연예인들은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체구가 외소하다던데. 보자 마자 후광이 비췰까? 내가 있는 공간 안에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면 신기할 것 같은데. 내가 알던 것과 달라서 이상할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하면 그들도 쑥스럽거나 불편하지 않을까? 혹시라도 가까워지면 나도 당황스러울 것 같은데. 그냥 서로 닿을 수 없는 정도, 지금이 더 좋은 건가? 모르는 게 약?
궁금한 것이 많고 예측이 어려울 수록, NG를 가리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화면이 아니라 아주 작은 실수까지 고스란히 드러날 수 밖에 없는 무대일 수록, 배우와 관객이 만나기로 결심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배우라면, 특히나 이미 누구나 알만큼 유명해진 상태라면 그런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단지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나를 붙잡고 있던 자리에 눌러 앉히는 힘이 느껴진다. 자동착석! "이건 이미 실무 놓은지 오래된 사람에게 다시 일 시키는 거랑 같은 거잖아?" 어리고 팔팔하고 아무것도 모를 때야 했지. 이젠 머리도 굵어지고 체력도 비실비실한데 어떻게 해? 모든 직종과 역할은 나이라는 무게에 취약해 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잘 해야 본전?
하지만 그는 한다.
왜? 내가 아니니까!
정말 간만에 찾은 예술의 전당, 몽환적인 무대 안으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온다. 그는 걷는다. 또 걷는다. 마치 필름이 느리게 재생되고 있는 것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걸어온다. 달린다. 또 달린다. 입장하자 마자 곧 퇴장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미쳐 가지고 달린다. 배우 황정민이다.
처음에는 스핑크스에 맞서 수수께끼를 풀고 신비로움과 강력한 힘을 가진 다부진 왕의 모습이었던 오이디푸스, 그러나 나라에 흉한 일들이 깃들고 백성들이 말라 죽어가면서 사랑하는 그의 백성을 위해 그는 신의 목소리를 들으러 길을 떠나야만 한다. 전왕인 라이오스를 살해함으로써 이땅에 불행을 불러 들인 원흉의 정체를 알아내어, 그 죄를 묻고 필요하다면 철처히 복수하여 추방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이는 진실을 애써 숨기며 입을 다문다. "정말 진실을 알고자 하는가! 그것을 어찌 감당하려고..."
감당을 해도 내가 한다.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물러설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사건의 단서를 가진 자들을 하나씩 목도하기 시작하면서 불길한 기시감에 휩싸인 오이디푸스, 아무래도 테베로 들어오는 길에 그와 마주쳤던 그 늙은이,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은 그 늙은이가 라이오스인 것 같다.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울 수 있지만 이보다 더한 비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신탁(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있어서는 안될 자식들을 잉태하게 되며, 끝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뽑고 스스로를 추방하게 되리라는)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부모님과 조국을 떠나 온 것이 도리어 그 신탁을 실현시키기 위한 길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 되었다는 그 엄청난 비밀 말이다. 하루 아침에 코린토스의 왕자에서 천한 출생일 지 모르는 자로 또 처참한 신탁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져 버릴 죄를 지은 용서받지 못할 자로 추락하는 오이디푸스!
모든 것을 알아 버린 그가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고 눈물로 절규한다. 물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발걸음을 떼어 간다. 바로 내 앞에서, 발바닥을 질질 끌며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 이내 어둠과 하나가 된다. 보이지 않을 곳에서도 여전히 걷고 있을 그를 느낀다.
모르는 게 약은 아니다. 비로소 알게 된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절망으로 다가오더라도 '기어이 진실을 마주하고 말겠다'는 인간의 의지만큼은 절망스러운 어둠을 뚫고 빛을 만들어 낸다. 세상이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자신의 내면은 스스로 만들어 낸 빛으로 환히 내 비추어 진다. 그는 스스로 내는 빛으로 세상의 공허한 진리를 읽어낼 눈을 얻는다.
알아봐야 득이 될 것 없는 현실을 보려하는, 그래 봐야 본전인 것도 아니다. '기어이 두 발로 걸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내 디딘 한걸음은, 그 자체로 원래의 것과 다른 궤적과 행적을 만들어 낸다. 걷고 또 걷는다. 그 만큼이 곧 그다. 두 발로 서 있기만 할 거라면, 굳이 중력을 나누어 질 두 손을 바닥으로부터 애써 떨쳐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 높아진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일어섰다면, 더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해 걷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오이디푸스,
이 곳에 더 이상 없는 게 아니라
어디에나 있을 수 있게 된
오직
알아야 겠다는
진실을 향해 걸어 가겠다는
인간의 의지로.
그는 말한다.
네 차례다.
알고자 하고
발을 떼 걸어라.
돌아오라.
생이 곧 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