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발, 두발, 세발로 걷는 자
스핑크스는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막아선 채 질문을 한다. "아침에는 다리 네 개, 낮에는 두 개, 밤에는 세 개로 걷는 자가 누구냐?"라고. 오이디푸스는 답한다. "수수께끼의 답은 인간이다"라고. 이로써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이 되었고, 스핑크스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스핑크스는 인간의 얼굴, 새의 날개, 사자의 몸통을 가진 괴물이었지만, 그 괴물이 낸 수수께끼를 단번에 풀어낸 오이디푸스는 부모와 자신 그리고 자녀의 고리를 한 몸에 지닌 변종이었다.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뒤 "너는 나다"라는 말을 남기고 투신을 한 것은, 이제 자신을 대신할 괴물이 오이디푸스가 될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가 남긴 마지막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신탁의 늪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걷고 또 걸어갈 것이다.
걷는다는 것
일상에서 잠을 자는 시간만큼이나 필수적이면서도 의도하지 않게 본능에 충실한 행동을 하는 것 중 하나가 걷는 게 아닐까 싶다. 어디론가 향하거나, 누군가를 가까이서 보려고 하거나, 먹을 것을 구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때마다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이게 된다. 그 모든 것은 걷는다는 범위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걷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런 때란 내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싶을 때'이다.
내 안의 질문자가 물으면 답하는 자는 걷기 시작한다. 하나의 답을 찾으면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다시 답을 찾는다. 더 이상의 질문이 이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한다. 나 자신과의 동행, 하지만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지워지는 건 ‘내가 걷고 있다’는 행위다. 질문하는 자와 답하는 자가 사라지면 비로소 다리의 움직임을 느낀다. 반대로 다리의 움직임이 느껴질 때 두 사람의 존재가 몸 안으로 녹아 사라진다.
마치 무대 위에 서서 대사를 읊으며 관중에게 다가가듯이, 몰입하고 싶은 한때를 떠올리며 혼자만의 상황극을 마음속으로 전개하면서 나는 걷는다. 때때로 무심하게 특정 방향을 응시하는 것은 거기에 눈길을 끄는 어떤 풍경이 있어서가 아니라, 상황극 속의 상대 배역이 그쯤에서 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상대 배역 외에는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아웃 포커스 된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스토리가 전개되거나 미쳐 마침표를 찍지 못했던 스토리가 아물어 간다.
의도적인 경로 이탈, "경로가 재설정되었습니다"라는 내 마음속의 안내자와 함께, 걸어야 할 거리가 더 늘어나도록 만드는 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생각을 자연스럽게 마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지 않아서다. 어쩌면 도착지에 다 달았다고 스스로 인지하는 것을 보류하고 싶은 일종의 회피 본능인지도 모른다. 아직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먹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다 잡지 못하는 자신을 에스코트하며 일상으로부터 보호한다. 스스로 문을 열고 내리기까지 도착지의 주변을 배회한다.
걸으면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하면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걷는다’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산다’는 행위로 옮아간다. 임의적으로 사는 것을 멈추지 않듯이 걷는 것 또한 그렇다. 걷는 동안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생각하는 것이 유의미한 게 아니라,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이 삶을 관통해 흐르는 것이 유의미하다. 일상은 스스로를 걷게 하기 위해, 살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걷는 것이자 사는 것은 스스로에게 묻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시작하든 질문의 답은 이것으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