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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지평선

확장하는 것이 다가 아닌

by 얄리

의도적인 관계 변화, 자신이 속해 있는 범주가 아닌 새로운 범주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로 선택한 것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같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하며,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면 어떨까? 서로가 함께 함으로써 각자의 삶의 지평도 달라질 수 있을까?


처음 진학한 대학원은 언론홍보대학원이었고 선택한 전공은 '광고홍보학'이었다. 온라인 에이전시에 근무하고 있었고 '미디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모인 사람들의 직업은 방송인, 언론인, 민간 및 공공기관 홍보담당자, CEO, 국회의원 등이 주를 이뤘다. 에너지가 넘치고 관계욕구가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첫 만남부터가 들썩 들썩하는 분위기로 시작했고 관계의 확장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교수님와 학생을 나눌 것도 없이 자신의 업에서의 성장을 도모할 인적 네트워크를 확보하려는 의도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관계 속에서, 나는 편안하지 못한 감정인 채로 관망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잠시동안은 나 역시도 똑같은 목적을 가진 의욕적인 사회인의 행세를 취할 수 있었지만, 나의 진심은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점 대학원 생활에서 은둔자가 되어갔고 겨우 중도 탈락하는 것만 피한 채 졸업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진학을 하기 전과 후를 비교할 때 관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원래의 생활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다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한계치에 다달았을 무렵,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관계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느꼈을 때 심리상담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곳은 상담심리대학원이었고 선택한 전공은 '조직상담심리학'이었다. 커리큘럼 자체가 워낙 자유도가 높고 세부전공에 관계없이 어울리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곳이라 모인 사람들의 직업은 천차만별이었다. 분야를 따지기 어려울 만큼의 다방면의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은 기본이었고, 아동을 돌보는 기관에 있는 사람들, 전업주부로 지내다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 경력을 쌓기 위해 온 사람들, 심지어는 목사님이나 신부님과 같은 종교인이나 군인과 경찰에 이르기까지 특정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했다. 하지만 그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인 사람들이 하나의 주제에 민감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삶이란 뭘까?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까?


각자의 향후 진로에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마음 속에 품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일단 말하기보다는 듣는 것에 더 익숙했다. 말을 꺼낸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때까지 그 사람을 바라보고 듣고 생각하고 자신이 해 주고 싶은 말을 진심을 담아 조심스럽게 전했다. 전공에 관련된 이야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삶에서 각자가 고민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 비단 학생 뿐만이 아니었다. 교수님 역시도 삶에서 겪었던 것 중에 돌아봤을 때 과했다 싶었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학생 중에서 과거의 자신처럼 일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나같은 사람들에게 경험자로서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의례히 끝나고 나서 동기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사정들로 조금씩 모임은 자잘하게 나눠졌지만, 나눠진 모임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찾았다. 개인이 선택한 졸업조건의 취득방식과 진도에 따라 학위를 마치는 일정은 달랐지만 낙오자 없이 무사히 마쳤다. 결과적으로는 일년에 한번씩이라도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를 주고 받으며 함께 나이들어가는 관계로 남았다. 넓지는 않지만 깊고 따뜻한 관계.


동기들과의 술이 빠진 저녁식사





관계란 개인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사람과 타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람의 차이가 있고, 30개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 중 한 두개가 사라지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3~4개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하나의 모임이 늘어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도 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달라진다. 나는 타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에너지를 소모하는 타입이었고, 하나의 모임이 늘어나는 것에 부담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만남을 가지기 전에 자신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했다. 내가 타인과의 대화에서 원하는 것은 네트워크가 아니라 삶에 대한 공감과 성장이었다. 막연하게 관계의 지평을 넓혀보자는 것은 도움이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타인들에게 유효하다고 해서 나에게도 유효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관계 안에서 타인은 뭘까? 내게 있어서 타인은 '내가 삶 안에 있음을 재확인시켜 주는 존재'다. 이를 테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아의 경우 포대기로 몸을 꽁꽁 싸메어 준다. 엄마의 뱃 속에 있을 때 자신을 잡아주던 막이 사라진 아이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포대기로 엄마의 뱃 속과 같은 압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으면 아이는 자신과 세상의 경계를 체감할 수 없어 경기를 일으킨다. 그처럼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신생아의 포대기 같은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나와 가까운 타인이다. 그런 타인은 내가 지나치게 하나의 이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싶을 때 한 텀 쉬어가는 쉼표가 되어 주거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방으로 시선이 분산되어 혼란스러워 할 때 초점을 다시 조정해 주곤 한다. 적어도 내게 적합한 타인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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