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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Jun 24. 2020

자기 효능감의 유혹

잊을 수 없는 실패

  내게는 실패의 기억이 많지 않아요. 대부분 성공할 만큼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맞을 거예요. 한때는 그것도 실력이라고 여겼지만, 시간이 흐른 후 되돌아보니 그게 가장 큰 실패라는 생각이 들어요.


  대기업에 있다가 조직에 대한 회의감에 막 창업을 하는 웹에이전시로 옮겼을 때 사수였던 분이 해 준 말이 있어요. "아니다 싶으면 되도록 빨리 그만둬"라는 말. "아니요. 끝까지 해볼래요. 적어도 십 년 안에 그만두는 일 없을 거예요" 사수의 말이 예정된 실패에 대한 예언이 되지 않도록 미친 듯이 일을 했어요. 기적처럼 5년 만에 회사는 대형 에이전시로 성장했고 나도 사원에서 임원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죠. 하지만 몸집이 불어난 회사는 사람을 자원이라 일컬으며 오직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만을 요구하는 냉혹한 전쟁터로 변해 있었어요. 이전에 느꼈던 조직에 대한 회의감과 다시 마주치게 된 거죠. "괜찮아. 나쁘지 않잖아"라며 자신을 설득해야 했을 때부터 자기기만과 환멸의 쳇바퀴를 돌게 되었음에도 멈출 수가 없었어요. 내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고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까. 결국 10년이 되어서야 쳇바퀴에서 내려왔죠. '다 이루었다'라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창업 파트너를 만나 회사를 운영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그건 다 이룬 게 아니라 5년 만에 실패할 것을 10년까지 미룬 것뿐이라는 것을, 실패를 인정하고 빨리 접었으면 자신을 망치는 시간 속에 체류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실패하면 갔던 만큼의 거리를 다시 돌아가 새로 시작해야 하니까 두 배 이상 뒤처지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안 그래도 남보다 못한 위치에서 시작하는데 뒷걸음마저 치게 된다면 무언가를 할 마음을 먹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게 두려웠던 것 같아요. 실패하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는 건 실패로부터 도망가거나 실패를 보류하는 일이었어요. 그 자체로 이미 진 거예요. 그것도 아주 비겁하게! 




   지나고 보니 그것은 '자기 효능감을 느끼고 싶은 욕심이 부른 참극'이었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것이나,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유대를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근본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오직 나 자신이 여전히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싶은 욕망만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쓸모가 있어야만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라는 것을 믿으려 하는 집착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일 중독이 불러온 '삶이 가진 진정한 가치 상실의 폐단'을 수없이 겪고 난 후, 비로소 평온한 일상에 안착할 수 있었다고 자신했던 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이상 내 손으로 직접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는 것은 힘들어지겠구나'하는 회의감이 겨우 얻은 삶의 여유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때는 업무능력이 출중했던 나를 기억이나 할까?'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서도 나 자신에게서도 지워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 때마침 회사에 한 장의 프로젝트 참여 요청서가 접수되었다.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모바일 분야의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접목된 과제'는 메마른 호기심에 열정이라는 불을 지펴 놓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프로젝트를 함께 할 고객과 협업 파트너 모두 이전에 함께 일을 했던 경험이 있어 서로 간에 신뢰도 이미 확보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매력적인 일과 믿고 함께 할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업계 경력이 20년에 육박한 이 시점에 나름의 기념할 만한 마침표를 찍고 해피엔딩을 그려내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잖아? 당신만 믿을게" 모두가 악마의 위임장이라도 챙겨 온 듯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그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일하는 자로서 한 획을 그어보는 거야"라는 마음을 먹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이란 없었다.



   일단 덥석 물었지만 정해진 기간 동안 정리해야 할 이슈들이 산더미였다. 남보다 한 발 앞서 공부하고 준비하며 먼저 치고 나간 만큼 모든 업무에 관여되었고, 수많은 이해관계자와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속한 회사를 포함해 총 4개의 회사는 갑과 을의 관계로, 분야 별 협업 파트너이자 경쟁자의 관계로, 사회적인 친분에 의지하거나 이용하는 관계로 얽혀 협력과 반목이 교차했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결과를 추구하는 사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밀어붙이는 사람, 무턱대고 의지만 하려는 사람,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선을 고집하는 사람, 모든 게 가소로운 듯 냉소적인 초월을 이룬 사람, 멘붕에 빠지며 짐을 싸서 도망치는 사람 등 다양한 군상의 민낯들이 드러났다. 일이 일로써만 다루어지기 어렵게 되었음을 직감하니 '어떻게 해서든 끝을 내고 탈출해야겠다'는 위기감만이 남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생선가시 바르듯 쪼게 쓰는 일이었다. 업무의 장소가 파견지와 본사로 나뉘었던 까닭에 하루에 두 번을 출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일에 대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나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가족 말이다. 함께 보듬고 살아야 할 사람들과의 시간을 일로 채우며 '다시는 일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을 뒷전에 두는 것은 하지 않겠다'라고 맹세했던 것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을 꾸역꾸역 삼켜냈다. 삼켜진 원망은 극도로 예민해진 감정들을 채 걸러내지 못하고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며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나는 이 모든 어그러짐에 책임이 없다'라고 회피하려는 역겨운 발버둥으로 치환되었다.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나라는 인간이 꼴 보기 싫다가, 빠져나오기 힘든 늪에 갇혀있는 것이 더없이 불쌍하다가, 그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이 나고 말 것이라 희망을 품다가, 나도 모르겠다고 놓아버리고 싶어 하는 감정들이 수시로 올라왔다. 하지만 주변이 나를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만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건 '이렇게 휘청대다니, 너는 더 이상 쓸모가 없구나'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예정했던 완료 시점을 훌쩍 지나 삐그덕 대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제삼자들의 개입으로 수습을 위한 책임 추궁과 결과물을 닦달하며 반복되는 숙제 검사의 과정 끝에 프로젝트는 종지부를 지었다. 너덜너덜해진 채로 돌아온 나는 망가져 버린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꼬박 한 달을 쉬어야 했다. 차츰 돌아오는 제정신의 시각으로, '실무적인 능력의 정점을 찍고 내려오겠다'는 환상에 일과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모조리 갉아먹었던 시간들을 복기했다. '이런 극단적인 결과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나라는 사람이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함께 하는 것을 받아들였더라면, 모두가 미친 듯이 언성을 높일 때 분위기를 소강시킬 수 있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려고 했더라면, 누구보다 자신의 한계와 과오를 먼저 인정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솔직함을 보였더라면 설령 결과물을 만족스럽지 않았더라도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쓸모가 있어야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는 말의 반대말은 '쓸모가 없으면 존재하는 의미가 없다'라는 말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존재란 쓸모의 유무로 의미를 부여받지 않는다. 그리고 '쓸모'라는 것에 가치를 '능력'으로 한정해서도 안되었다. 평생 동안 지속적이고 불변하는 능력치란 있을 수 없다. 특정한 시기에 만났던 사람들이 '다음에도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감정을 품은 채 헤어질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함께 했을 때 서로 의지할 수 있을 만큼 좋았던 감정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쓸모'란 '서로의 감정에 평온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배려심'이어야 했다. 결국 어줍지 않게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 상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 했던 마음은, 자신의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삐뚤어진 욕구로 상대를 이용하려 들지 않는 진솔한 대상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훼손시킨다.


   내 손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무언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등을 떠 받치고 있을 수도 있고, 끝을 모르고 내달리는 누군가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수신호를 보낼 수도 있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주저앉은 사람을 부축하기 위해 내밀어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일 중독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내가 호기심 내지는 열정이라고 부르는 색안경을 끼고 성취라는 이름의 환상을 바라볼 때, 이날의 오답노트를 슬그머니 들이밀며 스스로를 멈춰 세우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대게 중독은 "완치되었다"라는 가장 효과적인 미끼를 들고 다시 나를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회복 중'이라는 푯말을 가리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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