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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Jun 25. 2020

타월을 던지다

습관적인 TKO 선언

  오늘도 싸우지 않았다. 어쩐지 분위기가 싸하다 싶었지만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뾰로통한 표정을 읽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피했다. 다른 날도 둔했지만 오늘은 특히 더 둔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일이면 또 별일 없이 덤덤한 얼굴로 우리는 또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잠시만 불편함을 견디면 아무도 상처 받을 일 없다. 눈에 들어간 모레알 같던 공기가 시간이라는 창을 통해 환기되듯이, 모든 건 또 그렇게 흘러가고 말 것이다.


  "타월을 던지다"라는 건, 권투에서 경기를 계속하기 힘든 선수의 매니저가 티케이오(TKO)를 신청한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즉, "싸울 뜻이 없다"라는 말이다. 타인과 나 사이에 불협화음이 포착되면 나는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의례히 타월을 던지곤 했다.



01


  "모두를 위해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생각했다. 굳이 알아서 득이 될 것이 없는 진심을 알고자 벌집을 쑤셔대고 보여주기 싫은 민낯을 마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언성이 오고 간 후 제자리로 돌아가 무겁게 내려앉은 실내 공기 속에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게 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불편해지는 것이 싫었다.


02


  "너와 나라는 사람의 거리는 여기까지다"라고 선을 그었다. 어쩌면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데 나에게 맞추려 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싶었다. 서로에게 맞추어간다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당신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그냥 기대와 바람을 접는 것이 서로에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03


  "모든 것은 네가 나를 잘 몰라서 그런 거다"라고 단정 지었다. 사람의 속마음이란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얘기를 해 준다고 해서 얼마나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할 수 있을까. 네가 당신이 될 수 없듯이 당신도 내가 될 수 없다. 조금 더 알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서로는 모르는 게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04


  "어쨌거나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다"라고 밀어 두었다. 누군가를 골똘히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을 불편한 감정 속에서 흐릿한 이유들을 찾아 헤매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었다. 내게는 당신 말고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이 있다. 당신 역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서 잠시 마주하고 있는 대상일 뿐이다. 각자의 삶에 더 집중하는 것이 맞다.


05


  "알고 보면 별일 아닐 것이다"라고 믿었다. 우연히 나와 상관없는 안 좋은 일이 생겨서 표정이 굳어졌을 뿐일 수도 있다. 잠깐 기분이 상했지만 돌아서서 생각하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잠시간의 반응에 오히려 예민해져서 부딪히는 것보다 지나쳐 버리는 것이 별일이 아닌 것을 여전히 별일이 아니도록 만드는 일이라 생각했다.


  

매니저가 선수의 상태를 지나치게 염려해서 번번이 타월을 던진다면 어떻게 될까? 상대 선수의 주먹을  맞은 까닭에 상처도 적고 체력 손실도 적었을 것이다. 반면 맞서는 과정에서 미지의 대상이던 상대에 대해 싸우기 전보다  많이 알게 되고 자신의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상대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남겨질 것이다. 내가 그랬다.


  절친이라고 서로를 생각한 지 십 년이 지나서야 그리고 결혼으로 한 가정을 이룬지도 십 년이 지나서야 내 삶에서 '싸움'이라는 것이 실현되었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그만큼 마음속에 서운함도 잠시 지나가는 감정일 뿐 쌓아두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머리로 이해를 하는 것과 마음속으로 공감을 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이미 싸움이 시작되었으므로 모두를 위해 좋은 게 좋은 일이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주변의 불편한 시선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연인들이 길 한 복판을 가로막고 싸우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았다. 너와 나라는 사람의 거리는 여기까지라고 기대와 바람 따위는 가지지 않는다고 말을 했지만 아니라는 것은 나도 상대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상대를 나에게 맞추기 위한 기대이거나 바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네가 나를 몰라서 벌어진 일인 줄 알았지만 나라는 사람을 모르는 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에게 정말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내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어쨌거나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입에 달고 지냈지만 하루의 모든 시간을 오직 그 사람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 몸 안의 모든 세포가 내게 반기라도 든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알고 보면 별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 많은 것들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지나칠 수 있었던 것들이 운이 나쁘게 확대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고 쌓아놓은 것들이 일시에 폭발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친구가 다툼 끝에 눈물을 흘렸다. 나에게 의지하면서도 눈치가 보였던, 시기적으로 도와야 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자기 자신조차 건사하기 힘들어 도울 여력이 없던, 복잡했던 속마음이 두서없이 튀어나온 끝에. 가슴이 쓰라렸다. 하지만 안구건조증이 있는 사람처럼 눈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친구에게 다가가 안으려고 할 때 로봇이라도 된 듯 어기적 거렸다. 내 감정을 어떻게 꺼낼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안아주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늘 아재 개그 같은 우스개 소리만 늘어놓던 남편이 큰 목소리로 화를 냈다. 웃으면서 넘어갔던 일들 속에서도 마음에 상처가 되었던 것들이 있었고, 알아서 그만했으면 싶었지만 달라지지 않아 지치고 참기 힘들었던 것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속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속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도. 이러다 서로가 서로의 끈을 놓아버리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잃어버리면 안 될 만큼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무심함 속에 간과하고 있었다.


  "싸우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관계가 친밀한 것이 아니라 싸우는 일이 생겨도 등 돌리게 되지 않는 관계가 정말 친밀한 것이다"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친구의 눈물에 마음이 아프고 남편의 분노에 부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 서로가 등 돌리지 않는 근본적인 결속의 힘을 체감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나는 왜 번번이 타월을 던져 TKO를 유도했던 것일까? 그건 싸움의 끝에 등을 돌리게 되면 다시는 서로를 마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싸움을 해 본 적이 없으니 등을 돌린 경험도 다시 마주 본 경험도 없던 나는,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싸움을 극복하고 다시 다가갈 수 있다는 의지가 있으리라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대도 믿지 못했고 나 자신도 믿지 못했다. 세상에서 내가 모르는 것만큼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없었다.


  더 이상 타월을 던지지 않자 절친과 남편 외에 부딪히는 사람의 수가 늘었다. 물론 등을 돌린 후 다시는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하지만 서로가 몰랐던 것들을 더 알게 되면서 이전보다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 사람들 역시도 분명 있었다. 관계의 범주에서 허수였던 것들이 빠져나갔다. 절친은 말한다. "야! 너 그때 나 안아주려고 했을 때 엄청 폼이 웃겼던 거 아냐?"라고. 화해를 하기도 전에 나의 우스광스러운 포즈 때문에 이미 마음이 풀렸단다. 뭘 어떻게 할지 몰라서 어리바리하면서도 애써 다가오려고 하는 그 마음이 읽어져서 말이다. 남편은 말한다. "세상에 두려운 거 없는 호랑이인 줄 알았는데 겁 많아서 눈 동그랗게 뜬 야옹이던데"라고. 그 후로 여전사 같이 강인해 보이던 아내의 이미지는 홀라당 날아가고 세상 손 가는 것이 많은 철딱서니 없는 큰 딸로 전락하긴 했지만 굳이 강한 척하느라 속앓이 하는 것보다는 편했다. 타월은 던지라고 있는 게 아니라 잘 싸우고 나서 땀 닦으라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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