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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Jun 29. 2020

전략적 사고라는 착각

타성에 젖은 자기 계발 중독

  최근에 읽던 책을 덮었다.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책'이라 생각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왠지 모르게 '사람을 조정하는 법을 알게 되리라'는 속삼임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내 그 책을 읽고 있으면 10여 년 전쯤에 자기 계발서를 미친 듯이 읽어대던 때가 떠오른다는 것을 알았다. 책의 내용이 '사람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기술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를 테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지 마라. 그러면 그들은 당신에 대한 신비감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고 관심을 점점 잃어갈 것이다.'와 같은 것 말이다. 뭐랄까? 자기 자신을 값어치 있는 물건으로 팔기 위해 내놓을 때 써야 할 전략 같았다.


  한때, '사람을 다루는 기술'에 해당하는 정보를 담은 책들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졌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일하게 만드는 기술, 조직을 창조적인 혁신 공동체로 만드는 기술, 고객으로부터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술,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기술, 실패를 거울 삼아 묵묵히 추진하는 기술, 경쟁에서 1등을 하기 위한 기술 등. 직설적인 주장이 담긴 것부터 간접적인 스토리텔링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권에 이르는 책들을 읽다 보니 나중에는 유사한 예시, 유사한 메시지, 유사한 전개 방식 등이 난무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멈추었다.


  무엇보다 나를 멈추게 한 것은 그런 정보들에 노출될 때마다 내가 사람을 '인격'이 아닌 '자원'으로 인식해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관여된 일에 대하여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어떻게 배치할지, 어떤 프로세스를 밟을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어떻게 하면 이익을 크고 손실을 적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자동반사적으로 먼저 떠오르는 나날이 늘어갔다. 때때로 내가 의기소침해지고 슬럼프에 빠진 것 같을 때 나의 윗사람들은 책상 위에 '자기 계발 전략서'와 같은 류의 책을 살짝 놓아두고 사라지곤 했는데 그건 마치 에너지 드링크 같았다. 읽고 나면 갑자기 뭐든지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순간적이나마 성과를 내는데 유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효력은 날이 갈수록 짧고 약해졌으며 나는 더 큰 자극이 있어야만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두려웠다. '이대로면 자신이 추구한다고 세뇌된 목표를 위해 내 주변을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



  자기 계발서를 끊고, 자기 계발을 독려하는 곳도 끊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무언가 나를 갈고닦아서 성과를 이루는 것에서 멀어졌다. 고객을 만날 때나 협업 파트너를 만날 때나 동료들을 만날 때 판단의 기준은 '함께 일을 할 때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인가?'로 변했다. 일이 성사가 되거나 안 되는 것은 서로 간의 합이 맞는지 아닌지에 따른 것이라 생각했다. 설득을 하기보다는 의견을 말했다. 서로의 의견과 생각이 같으면 일을 자연스럽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더 이상 사람을 '자원'으로 보게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뭔가 나만의 목적성을 띄고 상대를 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되었고 서로 간에는 믿고 의지하는 '관계'라는 것이 형성되었다. 일이란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선에서 진행이 되었다. 뜻이 통하면 방법은 찾아졌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전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못한다기보다는 하지 않는 게 나은 경우가 많았다. 과도하게 친절하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결국 자신이 급해서 달려드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랬듯이. 그리고 사람들은 그다지 자신의 숨은 의도를 기가 막히게 숨기는 재능이 없었다. 내가 읽었을 자기 계발서는 남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사냥과 전투가 난무하던 시대를 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전자에 남아 있는 탓인지 퍽하면 '전략'을 운운하는 것도 신물 나는 일이다. 자기 안의 나와 타인을 번갈아 보며 타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특정된 목적을 이룰 생각으로 타인을 해석하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유도한다는 것은 오래 취할 태도가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도 같은 의도로 접근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내지는, 타인은 몰라도 자신은 알고 있는 본심에 의한 환멸에 스스로를 너무 오래 노출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읽어대던 자기 계발서는 지금 책장에서 거의 종적을 감췄다. 되돌아보면 일 밖에 모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에피소드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쉬운 건 그때 굳이 책을 읽는다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소설이나 에세이를 좀 더 읽어볼 것을 그랬다는 것이다. 나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삶의 진정한 가치나 생각의 관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그때 그 순간, 물이 흐르는 길을 찾는 법도 모르면서 '우직하게 땅을 파면 하늘도 감동하여 물을 주시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삶을 소모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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