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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May 29. 2020

거울에 갇힌 자아

자존심, 과도하게 증식한 자기애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어린 시절에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생계의 전선에 뛰어들고 가정을 꾸리며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살아가다가 문득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싶은 생각이 든 후 나 자신을 바라보자 지난날에 내가 느끼던 것과는 사뭇 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삶에서 중요한 선택들을 마구잡이로 해 놓은 것은 아닌지, 어쨌든 '나의 선택에 의해 얻어진 결과로써의 현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마치 죄를 지은 사람이 속죄의 나날들을 살아내듯 남은 시간들을 견뎌야 하는 것인지, 왜 좀 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순간의 생각과 감정에 퇴고 없이 그대로 휘둘렸는지 여러 가지의 것들이 나를 괴롭히던 때, '나름 자신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을 잃어버린지도 모른 채 살아왔던 것일까?'라는 생각은 자책에서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으로까지 번져가고 있었다.



자기애를 느낀다면, 정상입니다.


  ‘정상범 주의 자기도취’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애를 느끼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아가 있고 그것에 애정을 느껴야 존재가 성립하므로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삶을 살아가다가 힘든 순간을 만났을 때 자신을 달래 줄 자아는, 자기애를 바탕으로 본연의 치유력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애가 병적인 수준으로 해석되는 건, 과도하게 증식하여 관계에 취약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이다.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섰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자아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결핍된 것을 의미한다. 결핍은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상실감은 어떻게든 빈 곳을 채우려는 욕구를 느끼게 하고 대부분 타인을 향한 구애로 이어진다.

 


자존감인가 자존심인가


  ‘내가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아의 통일된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 자존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요구하는 것'과 구분된다. 어떻게 다를까?


  감정을 느끼는 지향이 자신에게 있는지 타인에게 있는지가 다르다. 자존감은 타인의 표정과 관계없이 본인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게 하지만, 자존심은 타인의 표정에 따라 감정이 요동치게 한다. 자존감이 상하는 일은 없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내적 상처가 생기는 것은 타인이 무기로 작용하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인데, 실상 무기를 주문한 것은 본인일 때가 많다.


  감정의 희비를 느끼는 폭이 다르다. 자존감은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든다. 기뻤다가 잠잠해지고 화났다가 잠잠해진다.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자존심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진폭 속에 자신을 방치하게 만든다. 기쁨이 주체할 수 없이 일어났다가 화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끓어오른다. 오래도록 느낀 감정에 수장되고 좀처럼 헤어 나오기가 힘이 든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포용력이 다르다. 자존감은 내적 충만과 항상성에 의해 얻어진 여유로,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는 포용력을 갖추게 한다. 자신의 감정에 비추어 타인을 이해하거나 위로할 수 있다. 자존심은 타인의 감정을 읽는 눈을 가리거나 왜곡시킨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보이는 것이 없는 것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한다. 타인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타인에게 투영된 자신을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공감하는 게 아니라 착각하는 것이다. 늘 이해받고 위로받을 대상이란 오직 자신뿐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  


  과도한 자기애는 자존심으로부터 발현된다. 자존감은 투명한 유리창 앞에 서서 그 넘어의 풍경에 시선을 두게 하지만, 자존심은 언제나 거울 앞에 서서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투명해서 비치지 않아도 자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은 것과 눈앞에 보여야만 내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믿을 수 있는 것의 차이다.




 어떤 단어는 입으로 내뱉는 것만으로 주위 사람과 자기 자신을 환기한다. 그것이 자주 적확하지 않게 사용되면서 사고의 방향성을 유추하게 할수록, 그리고 유추의 끝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무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할수록. 더욱더.


  이를테면 '자존심'은 '자존감'과 동일하지 않지만, 곧잘 혼용된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자존'을 인식하는 사고의 방향성이 다르다. 자존심이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을 통해 인식하는 데 반해 자존감은 자기 안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인식한다. 거울 앞에 서서 바라보아야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것과 거울을 눈앞에서 치워도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의 차이다.


  그런데 그 차이점보다 중요한 건 거울에 비친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존심은 실제의 자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앞에 서서 미소를 지어 보인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고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슬퍼지지 않는다. 비친 자신이 행복해 보이거나 슬퍼 보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거울 앞에서 표정에 신경을 쓰는 것은 타인과 자신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이 마음속에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것이 있고 없는 것 혹은 강하고 약함이 곧 자존심의 유무 내지는 강약이 된다.


  그렇다면 '자존심이 상하다'라는 말은 뭘까? 그건 자신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과 다른 모습을 들켜 버린 까닭에 '인위적인 의도를 가졌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생긴 것'이다. 자존은 스스로 체득되는 것이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훼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한 것은 존재가 아니라 마음이기에 '자존이 상하다'라고 하지 않는 것임에도 우리는 마치 존재 자체에 타격을 받은 것처럼 느낀다.


  이럴 때 "모든 건 내 안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없기 때문이야"라고 나의 무의식은 속삭인다. 나를 둘러싼 공기에서 박하 향이 묻어나는 건 무의식, 그가 왔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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