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절대적 관점에 대한 동경
지난날의 나에게 경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나와 유사한 길을 걷고 있는 타인이었다. 때때로 특정인과 무의식적으로 라이벌이 되어 서로를 견제하며 더 잘하기 위해 애를 쓰는 동안 함께 성장해 나가는 시간들도 있었다. 그에 수반되는 성장통도 있었지만, 이때만 해도 경쟁은 일종의 스트레스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희열의 근원이었다. 단순했다. 가위, 바위, 보 끝에 '이겼다' 혹은 '졌다' 결론이 나는 것처럼 그다음의 무엇은 없었다. 굳이 있었다면 '다음에도' 혹은 '다음에는' 정도의 복기성 다짐뿐.
시간이 흐른 뒤 언젠가부터 나에게 경쟁의 대상은 그 어떤 타인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서로의 삶이 엎치락 덮치락 하며 변덕을 부리는 탓에 특정 시점에서 앞선다고 좋아할 것도 뒤쳐졌다고 불안해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의 삶은 각자의 몫이라 상대의 행복이 나의 행복을 가로챈 것도 아니고 상대의 불행이 나의 불행을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쉽게 깨닫게 된 것은 아니었다. 타인의 행복 앞에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거나 타인의 불행을 보며 내 삶을 안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족이 자존감을 갉아먹고 있다는 싸인'이라는 것을 자각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곤욕스러운 것은 자존감이 떨어지는 증상에 대한 완벽한 백신이 없다는 것, 주기적으로 걸렸다 낫고 다시 걸리는 감기처럼 심적 면역력은 미해결 된 방어체계를 지녔다는 걸 경험하면서 타인에 빗댄 행복과 불행의 이면을 살피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하고도 경쟁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경쟁상대였던 타인의 자리를 소리 없이 대체하고 있는 사람, 그는 과거의 나였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볼 때, 회사에서 동료들과 일을 할 때, 하루의 시간을 살아내는 틈틈이 '과거의 나는 이렇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타인처럼 명료하게 각자의 삶이라는 선긋기도 되지 않는 존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만 짙어가는 기분, 더군다나 자신과의 경쟁은 동반성장이라는 부수적인 이점조차도 없는 소모전이었다.
삶에서 상대성은 지우고
절대성을 지니고 싶다.
자신의 모습이 전과 다르게 늙어가고 불편한 것들이 늘어날 때에도, 내 삶 속에 함께 하는 이들로 인해 일상이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는 걸 피할 수 없을 때도, 나의 능력이 타인보다 뛰어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족해서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지거나 부담을 지우게 될 때도, 무언가 눈에 띄는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나날들이 지속되어 권태로움을 느낄 때도 내가 싫지 않을 수 있는 것. 나 자신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것. 내가 생각하는 절대성이란 그런 것이다.
삶에 대한 내 관점의 재편, 내가 원하는 절대성을 얻기 위해서 기존에 답습하던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판이 내게 필요했다. 그건 경쟁부문에서 비경쟁부문으로 전환하는 또 다른 의미의 도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삶에 있어서의 특정 선호 편향이 사라져야 했다. 이를테면 여전히 과거의 젊음을 동경하며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하는 젊음 편애라든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세상에 유용한 존재가 되고 타인에게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생겨난다는 능력 편애와 같은 것 말이다. 어차피 그 누구도 젊은 채로, 변함없이 능력을 발휘하며 지속적일 수는 없다. 편향은 휘발할 것들에 대한 맹목적 집착에 불과하다.
내 삶 속에 함께 하는 이들이 차지하는 몫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그들의 삶에서 그들이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쓸 것을 빼앗아 온 것이 아니듯 그들 역시 온전히 내 것이 될 것의 일부를 빼앗아간 사람들이 아님을 전제로 한 정당한 그들의 몫을. 우리는 절대적 고독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의 일부를 서로에게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지불할 것은 쿨하게 하고 자신만의 시간에 대해 양적인 확보보다는 질적인 깊이를 더할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대부분의 시간을 채우는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시간들에 담담해져야 했다. 때로는 그 시간들은 평범하다는 이유로 무가치하거나 버려지는 것처럼 느껴지곤 하지만 정작 무언가를 잃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간헐적으로 기억되는 불행이나 행복의 순간이 아니라 늘 당연하게 하고 있어서 그것의 소중함조차 알기 어려웠던 루틴 한 행적일 때가 많다. 사랑했던 존재의 부재 이후 간절하게 떠올리는 것이 그 사람과 함께 도란도란 식사하던 일상의 저녁 풍경인 것처럼.
삶의 절대적 관점이란 여태껏 세상이 내게 가르쳐 준 것에 기반한 관점을 경험과 자각으로 대체하는 나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비로소 지나치며 주워들어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색안경을 낀 채가 아니라 온전한 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또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 말이다
이제서야 겨우 시작된 비경쟁부문의 서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