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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May 29. 2020

내 안의 프레임

자발적 구속



  '나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행동은 나로부터 나온다'라고 여겨왔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워지곤 했었다. 말은 하나의 방향성을 지녔지만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 즉 마음은 다른 잡음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잡음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내 생각안에 뿌리를 내린 나만의 프레임이었다. 그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묘하게 왜곡시킨다. 마치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현재의 자신에게 보이는 것대로 생각하며 안주하지 말고 항상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라'든지,  '타인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든지, '아무것도 없는 평온한 일상에 익숙해져라. 평온을 깰 수 있는 것을 멀리하라'든지,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만들라'든지, '항상 나이가 주는 중압감에 압도되지 말고 마음만은 젊게 살라'든지, '자기 자신을 독려하며 약한 모습 보이지 않도록 강하게 살아나가라'든지. 


  세상에서 주워들은 말들은 어느새 내 삶이 나아가야 할 표지판이 되어 수시로 흔들리는 내게 "이쪽이야!"라며 방향을 가리켰다. 도대체 인간이 표지판에 힘입어 살았던 날이 얼마나 되는 걸까? 이제는 표지판이 없으면 단 한 발자국도 내딛기 두려워할 정도로 중독이 되어 버린 걸까? 그 표지판의 끝에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쫒아가기에만 급급했던 시간들 속에 번번이 걸려 넘어진 후에야 "나는 어디로 가고 있지?"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혹은 "꼭 어디론가 방향을 가지고 가야만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그리고 내가 지향해 온 표지판들을 떠 올려 본다. 그것은 과연 내 삶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는 지표가 맞았던 걸까? 낙서판의 문자를 방향이 적힌 표지로 읽었을 수도 있고, 나보다 앞서간 사람이 얼떨결에 툭 쳐서 반대방향으로 화살표를 바라보게 만들어 놓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지표조차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오랜 시간 지표를 따라 달렸던 것만큼 그 지표를 의심하게 되는 날이 늘어났다. 놀라웠던 건, 이제야 그 생각이 난 것이었다. 의심 없이 가기만 한 나 자신이었다. 정처 없이 걸어가는 나그네조차도 자신이 '정처 없이 걷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을 것이다. 삶을 탐험한다고 떠났지만 삶을 배회해 왔다. 


편향이란, 
한쪽으로 치우침을 의미한다.

 

    어느 날 내가 의심 없이 살아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았을 때 커다란 공백이 있었음이 감지되었다. 그 공백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길 이외의 다른 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걷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은 양쪽의 균형을 맞춰 걷는 것에 대해 상상하기 어렵다. 기울어져 있는 세상이 그에게는 가장 편하고 익숙한 세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들 속에 내가 그렇게 살았다. 그 삶에 대한 한치의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말이다. 


  내 삶에서 나라는 사람이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일종의 한계를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이전과 같지 않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시력을 잃고 나서야 다른 감각으로 살아갈 방법을 익힐 생각을 하는 것처럼. 만일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체감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이전과 다르게 사는 것 따위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과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야 나는 그동안 나도 모르게 일정한 프레임 속에 나를 가두며 지내온 것을 느낀다. 그렇게 나는 나를 피치 못하게 가두었다. 너무나 많은 방법은 그 어떤 방법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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