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쁠 수 없는, 인정할 수 없는 오류
나쁘지 않아, 내게 있어서 그건 '괜찮다' 내지는 '그만하면 되었다'의 의미가 아니다. 그건 '만족스럽지 않다'이거나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아'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현재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선택하기에는 그다음에 대한 계획이 아직 없고, 어쩔 수 없이 무언가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지금의 상황을 고수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길 때, 스스로에게 지금을 견뎌야만 할 이유를 만들어 주어야 할 때 나는 그 말을 쓰곤 한다. 잠정적인 판단 유보와도 같은 것이다.
오랜 시간 근무하던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있을 때나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일에 몸을 숨길 때 나는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무언가 현실을 바꾸기 위한 행동을 하기에는 동기가 생겨나질 않아서 느끼는 막막함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현재의 자신을 보면 또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삶을 사는 것도 같았다. 더 큰 고민과 걱정거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이 정도는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거야'라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사탕을 쥐어주고 화제를 돌려 아이의 울음을 뚝 그치게 만들기라도 하겠다는 듯. 막대사탕 같은 말,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말은 잠시 동안 달았다.
사는 것이 각박하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신경을 쓸 만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몸에 어딘가가 이상이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충분히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루를 살아갈 때 무언가 몰입할 수 있는 몇 시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마음을 빼앗길 만큼의 신나는 일이 없다는 것은, 늦은 밤 침대에 누워 노곤한 피곤을 느낄 만한 적절한 소진이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좋을 수 있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좋지 않다는 것이 완전히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것에 의지하려 애를 썼다. 나쁘지 않은 것은 좋은 것이라는 단순한 대칭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탐하지만 현재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오직 그 하나에만 목숨을 걸듯 몰입하면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어느 순간 원하는 것을 이루고 난 후 성취감에 취했다가 이내 더 이상 탐할 대상이 없어졌음을 깨닫고 깊은 공허감에 빠져들고 마는 것. 이루어 놓은 것들을 발아래에 깔아 두고 두 발로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수평선을 바라보며 서 있는 그런 기분, 달갑지 않게도 익숙한 그 기분. 나만의 겪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위안을 받고 싶어했다. '오직 내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굳이 어렵게 가지 말자'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유는 분명히 있지만 찾고 싶지 않아
다시 힘들거나 혼란스럽고 싶지 않아
호기심에 심장이 간질거리면서도 혼돈과 파괴를 담고 있을지 모르는 판도라 상자를 열고 싶지 않기에 나는 번번히 나쁘지 않다는 주술을 걸어 나의 출렁거리는 감정들을 봉인한다. 과연 내 앞에 있는 것이 판도라 상자가 맞기는 한 걸까? 혼돈과 파괴는 판도라 상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평온한 일상 속에 멍 때리며 보내는 시간이 불필요하거나 위험할 리 없다. 그것이 온전히 휴식이 된다면 삶에서 묻어온 먼지들이 그 시간 속에 서서히 휘발되어 좀 더 선명한 시각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다만 그 시간 속에 어딘지 모를 불안함이 올라온다면 그건 그 시간을 타인과 비교해 뒤쳐지거나 무의미하게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걱정스러움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그 감정의 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그 정체를 분명하게 알고자 하지 않고 덮어두기 때문에 그 두려움으로 인해 불안정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타인의 무엇보다 뒤쳐진다고 생각하는지, 무의미하지 않은 삶이란 뭔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왜 자신을 괴롭히는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들의 상당부분은 봐야 할 것들이지만 등을 돌린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