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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Oct 26. 2020

노화하는 껍데기

껍데기에 대한 집착과 껍데기로부터의 일탈

  얼마 전에 '자신이 현재 몰입하고 있는 고민과 그것에 대한 감정을 이미지로 형상화해보는 수업'을 들었다. 스스로에게 한 문장으로 된 명제를 던지고, 그것에 대해 연상되는 것들을 그린 후, 완성된 그림을 담담하게 응시하며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다시 글로 옮겨 적고, 글의 전부 또는 내용 중 가장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는 방식이었다.


내게 있어서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탐색해 본다.

  

내가 나에게 던진 명제는 이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것은 아니다. 수년간 이것에 대한 나의 솔직한 생각이나 감정을 알고자 했으나 번번이 끝까지 집중해서 알아차리는데 실패했다. 관련된 책을 읽고 영화를 찾아보았던 것으로 보아 분명 지금의 내게 중요한 화두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알고 싶은 것과 알기를 거부하는 것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럴 때, 수업 중의 과제라는 타의적 강제성이 조금은 내 안의 혼돈을 잠시 치우고 나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갈 수 있게 안내를 해 주는 느낌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본다. 그리고 의도적이지 않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좀 더 선명해지기까지 기다려본다. 주어진 시간은 60분, 떠오르는 것들을 검열하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시간의 한계가 오히려 연상의 가속을 붙이는 것 같았다. 어느새 60분이라는 시간이 사라지고 허겁지겁 그려 놓은 것들을 마무리한 채 가지고 있던 도구들을 내려놓는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후 '그리던 나'에서 '바라보는 나'로 옮아간다. 마치 타인이 그린 것을 보듯이. 그리고 그림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들을 하나씩 메모해 본다.


  종이의 반을 가르는 지점에 서 있는 사람은 좌우가 상반된 형상을 하고 있다. 한쪽은 여전히 젊은 모습이고 다른 한쪽은 늙고 허물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


  여전히 젊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의 주변이 복잡하다. 해야 할 일들이 적힌 달력과 업무에 필요한 소품들 그리고 약간의 짬이 났을 때 긴장을 푸기 위한 도구들이 즐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상과 육신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듯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상과 육신의 관계는 구속과 복종의 관계다. 어둡고 무겁고 피곤한 느낌이 든다.


  늙고 허물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의 주변은 많은 부분이 비어 있다. 갇혀 있는 공간이 아닌 것으로 보이고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표현할 도구들이 즐비하다. 몸이 흉물스럽게 일그러져 있지만 개의치 않아하는 모습이다. 등 뒤에 돋아난 날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밝고 가볍고 평온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이 사람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지금의 내 모습일 것이다. 지면을 디디고 서 있는 사람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져 있지 않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버티고 있는 것 같다. 망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거울, 나는 매일 거울 앞에서 나를 관찰하곤 한다.


  나는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 형상 안에 갇힌다. 내 몸이 서서히 달라지겠지만 아직 그것을 당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결국 내 몸이 내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게 더 이상 지금과 같지 않다면 나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나를 관찰하던 것을 멈추면 바라보고 있다는 이유로 형상에 갇힐 이유도 사라진다. 이유가 사라지면 홀가분해질 것이다. 그즈음이 되면 나는 내 몸을 무엇이라고 인식하게 될까?



  

껍데기,
종국에는 껍데기가 될 것들

  

  지금의 나는 그 껍데기 안에 갇혀 있다. 하지만 껍데기란 말 그대로 아무런 힘이 없다. 그 안에 나를 가두어 둔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것에 집착하는 내 마음이다. 아무런 힘이 없는 그 껍데기에서 나는 빠져나올 언젠가를 꿈꾼다. 굳이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 않아도 언젠가는 의식할 필요성이 소멸함으로써 꿈꾸던 일탈을 이루게 될 것이다. 생각을 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세상과의 매개체로만 존재하는 것, 그것이 몸(껍데기)이 내게 있어서 유효할 모든 것이다.


내게 있어서 늙어간다는 것은
나의 육신이 껍데기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메모해 놓은 것들 중에 내 몸에 대해서 '껍데기'라고 호명할 때 목이 메었다. 몸이 더 이상 나를 대변하는 형상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매개체로 용도가 바뀌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잘 아끼며 삶이 끝나는 날까지 감사하며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게 보이는 것에 연연하기보다 내 생각과 감정 그리고 말과 행동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말이다.


  어쩌면 수년간 나는 '껍데기'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기를 주저했는지도 모른다. 입에 담는 그 순간 더 낡고 일그러져 버릴 것만 같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라 여겼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편치 못한 마음을 감내하고서라도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망설임의 궁극적인 이유는 여전히 외향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대한 집착이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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